언덕

무얼 했니? 원래는 삐죽 솟은 산이었는데 자꾸 미끄러져 내려서 그렇게 나지막해진 거니?

무얼 했니? 원래는 아득한 벌판이었는데 점점 쌓이기만 해서 그렇게 웅크리게 된 거니?

바람은 왜 여기 와서 기웃거리니? 너와 나는 오늘밤 뜬눈으로 보내야 하는 거니?

―박덕규(1958~ )

언덕! 발음으로나 의미로나 좋기만 하군요. 나쁜 일이라고는 일어날 것 같지 않아요 언덕에서는. 각(角)이 아니라 원(圓)이잖아요 언덕은. 절벽의 가파름과 평지의 지루함이 아니어서 절망이나 권태를 주지 않지요. 감춤과 드러냄이 반씩 섞인 일종의 춤사위의 지형이지요. 언덕에 누워본 적이 있으신지요. 소의 잔등에 기댄 것처럼 숨 쉬는 언덕을 느껴본 적이 있으신지요. 소풍 때의 언덕이 그러했지요. 이승을 소풍이라고 얘기한 선배 시인이 있었지요. 소풍에는 우열이 따로 없지요. 적이 없지요. 증오 같은 것은 다 녹고 오만과 편견과 집착이 풀어지지요. ‘삐죽 솟은 산’의 겸(謙)이 언덕이고 ‘아득한 벌판’의 기(起)가 언덕입니다. 소풍은 언제나 언덕에 머무릅니다. 거기서 ‘너와 나’ 사이에 ‘바람’이 기웃거립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바람만이 아는 일이지요. 초롱한 가을 별들이 ‘뜬눈’으로 지새우는 가운데 언덕이 하나 새로 생겼을 겁니다. ‘너와 나는 오늘밤/ 뜬눈으로 보내야 하는 거니?’ 앙큼한 마지막 구절! 곧 하늘이 높아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