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가 밝힌 安 무죄 이유 보니…
"유일한 증거는 김씨 진술인데… 신빙성 낮다"
"김씨,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 강한 모습 보여와"
"위력 관계는 맞지만… 위력 행사한 것은 아냐"
"권력형 성범죄 추방해야 하지만, 安 처벌 어려워"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4일 열린 자신의 성폭행 혐의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입장을 밝히고 있다.

수행비서 김지은(33)씨를 성폭행하고 강제추행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53) 전 충남지사에 대해 1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의 위력 행사가 없었고, 김씨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현행법이 정의한 성폭행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안 전 지사는 작년 7월부터 7개월여 동안 김씨를 4차례 성폭행하고, 5차례 기습추행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사건을 심리한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조병구)는 안 전 지사의 유·무죄를 가릴 쟁점을 네 가지로 봤다. △두 사람의 사이에 업무상 위력이 존재했는지 △안 전 지사가 위력을 행사했는지 △위력의 행사와 성행위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 △이로 인해 김씨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됐는지 등이었다.

◇"유일한 증거는 김씨 진술… 신빙성 의문"
이 사건의 '사실상 직접적이고 주요한 유일의 증거는 피해자의 진술'이라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다만, 재판부는 "김씨가 대체로 일관되게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증언·진술을 했지만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고 했다.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김씨는 안 전 지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난 뒤 텔레그램 대화 내용을 대부분 삭제했고, 다른 참고인들과의 진술이 일치하지 않았다. 또 개별사안 직후 김씨가 지인들에게 보낸 텔레그램·카카오톡 메시지와 김씨의 주장이 상반되는 측면이 있다는 게 재판부의 결론이다.

재판부는 “김씨의 진술에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게 성폭력 피해로 인한 심리상태 때문인지도 여러차례 검토했다”고 했다. 그러나 결론은 같았다. 재판부는 "김씨는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이 강한 모습을 보였다"며 "개인적 취약성 때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차량 안에서 강제추행을 당했다는 지난해 11월 26일의 경우 김씨는 스스로 바지 벨트를 풀어 안 전 지사가 몸을 만지기 쉽도록 했다. 이를 두고 김씨는 “운전기사가 (강제추행을) 눈치챌까봐 소리나지 않도록 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차량 내에서 안 전 지사와 텔레그램을 주고받거나 다른 사람과 카카오톡을 주고받은 점 등을 보면 김씨의 주장을 믿기 어렵다”고 했다.

◇"안 전 지사, 위계·위력 행사 없어"
재판부는 안 전 지사와 김씨 사이에 위력 관계가 존재한다고 전제했다. 유력 정치인이자 도지사로서 지위와 그 비서의 관계는 '위력'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를 안 전 지사가 상시적이고 일반적으로 행사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도청 내에서 안 전 지사가 '위력의 존재' 자체로 김씨의 자유 의사를 억압했다고 볼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개별 사안에서 위력을 행사해왔는지 여부에 관해 사실상 직접적이고 주요한 유일의 증거는 김씨의 진술"이라며 "여러 정황 증거들을 종합해 보면 이를 그대로 신빙하기 어려운 사정이 다수 존재한다"고 했다.

안 전 지사의 위력 행사로 보기에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고 했다. 재판부는 2017년 8월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안 전 지사가 '씻고 오라'고 하자 김씨가 별 다른 저항이나 반문 없이 응한 것으로 봤다. 재판부는 "시간·장소·당시 상황·과거 상황 등에 비춰 그 의미를 넉넉하게 예측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도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고 했다. 당시 김씨는 호텔 객실이 모두 매진되지 않았음에도 운전비서에게 ‘호텔이 만실이니 다른 곳에 숙박하라’는 취지로 말해 운전비서가 다른 곳에 숙박하도록 했다.

또 김씨의 폭로 직전인 올해 2월 25일 서울 마포 오피스텔에서의 간음 사건에서도 김씨는 안 전 지사의 TV 프로그램 녹화 이후 대전으로 내려갔다가 안 전 지사의 연락을 받고 심야에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재판부는 "수행비서도 아닌 피해자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경위에 대해 의문이 있다"며 "마포 오피스텔 사건 전후 과정에도 위력의 행사로 보기에 의심스러운 정황이 다수 있다"고 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비서 성폭행 혐의에 대해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직후 ‘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무죄 판결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현행법으로는 성폭력 처벌 어려워
재판부는 김씨의 진술에 기초해 사안을 보더라도 현행 성폭력 범죄 처벌 법제 하에서는 안 전 지사의 행위를 처벌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른바 ‘노 민스 노(No means No) 룰’이나 ‘예스 민스 예스(Yes means Yes) 룰’이 입법화되지 않아서다. 노 민스 노 룰은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는데도 성관계로 나아간 경우 이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것을 뜻한다. 예스 민스 예스 룰은 상대방이 명시적이고 적극적으로 동의했을 때만 처벌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재판부는 "노 민스 노 룰이나 예스 민스 예스 룰이 입법화되지 않는 현행 우리 성폭력 범죄 처벌 법제 하에서, 안 전 지사가 '위력을 행사해' 간음을 저질렀다고 볼만한 증명이 이뤄지지 않은 사안에서는 처벌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 사건은 안 전 지사가 '위력을 행사했는지' 여부에 가벌성(可罰性)이 달려있는 것이지, '김씨가 어떻게 느꼈는지'는 안 전 지사의 처벌과 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권력형 성폭력 행위가 우리 사회에서 추방돼야 한다는 점과 이를 위해 사회적으로 연대활동이 필요하다는 점에 십분 공감한다"면서도 "사안이 형사법정으로 온 이상 헌법적·형사법적 원칙에 기초해 심리해야 한다. 재판부에서 본 사건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