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 동맹을 이끈 논객이고, 시인이자 영화배우였던 임화(1908~1953). 그는 1908년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보성고보를 다니다가 가세가 기울자 중퇴한 뒤 문학과 영화에 홀렸으며, 톨스토이·고리키·투르게네프 같은 러시아 문학에 심취했다. 이 '모던 보이'는 카프를 이끌던 박영희를 따르면서 이전과 다른 전위(前衛)의 삶으로 건너갔다.
임화는 해방 공간에서 '가난한 동포의/주머니를 노리는/외국 상관(商館)의/늙은 종들이/광목과 통조림의/밀매를 의논하는/폐 왕궁의/상표를 위하여/우리는 머리 우에/국기를 날릴/필요가 없다!'라고 썼다. '더러운 하늘에 무슨 깃발이냐'라면서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라고 선동했다. 유치환의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나 '백로처럼 날개를 펴고' 나부끼는 깃발과는 다른 임화의 깃발은 이념의 깃발, 해방의 깃발, 승리의 깃발이다.
임화는 '네거리의 순이' '우리 오빠의 화로' 같은 시를 쓰고, 카프의 가면을 쓰고 대중에 부르주아 사상을 전파하려고 부화뇌동하는 문인을 향해 날 선 비판을 하며 카프 중앙위원에 진출했다. 박영희의 도움을 받아 도일(渡日)해서 카프 도쿄지부와 '무산자사(無産者社)'를 이끌었다. 1931년에 서울로 돌아와 카프 조직을 이끌었지만 카프 조직원 1차 검거 때 종로경찰서에 붙잡혀 들어갔다. 카프 맹원 2차 검거 때 자진해서 해산계를 내고 카프는 와해되었다.
해방 무렵 노사 쟁의 현장에서 울려 퍼진 투쟁가들이 임화가 작사하고, 김순남이 작곡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47년 11월, 남로당의 우두머리 박헌영을 따라 월북하면서 그의 운명은 예측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의 종군기자로 낙동강까지 내려왔는데, 곧 남로당계가 숙청될 때 자신도 미제(美帝) 스파이로 몰려 처형될 운명인 것은 몰랐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