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어느 여름, 그와 나는 꽤 오랜 시간을 걸었다. 세 시간 남짓, 남산을 올랐다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둘은 그다지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해줄 말을 찾지 못한 나 혼자만의 침묵이었다.
그는 직장 대표의 폭력과 폭언, 협박으로 퇴사한 20대 청년이었다. 갑질이란 단어가 생소하던 때 그의 외침은 허공으로 사라졌고, 동종업계 지인들은 "가뜩이나 좁은 업계에서 너만 재취업 어려워지고, 다칠 텐데…"라며 걱정 섞인 침묵을 강요했다. 청년은 울지 않았지만, 눈동자 뒤의 눈물이 자꾸만 내 눈에 비쳐서 위로를 건넬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갈 테니까요. 괜찮은 모습으로 다시 뵈러 올게요." 헤어지며 건넨 인사말에 나는 애써 웃음 지었다. 언제쯤 정말 그는 괜찮아질까. 우리는 언제쯤 밝게 웃으며 재회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긴 할까.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지나, 그에게서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저, 꼭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마주 앉은 그는 꽤 건강해 보였다. 어느 날은 제주도, 어느 날은 대구에서 지내며 때로는 여행을, 때로는 중고 책 판매를, 게스트하우스의 점원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게 무너진 듯한 그 순간에도 삶은 계속되고, 최악으로 치닫지만은 않음을, 그래서 잠시 멈추어도 괜찮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목포 바닷가 어귀에 마을을 만든다고 했다. 이미 정부로부터의 지원을 확정 지은 상태였다. 방황해도 괜찮고, 아무 생각 없이 쉬어도 괜찮고, 새로운 삶을 준비해도 괜찮은 청년들의 마을. 이름이 '괜찮아 마을'이라고 했다. 자신이 지나온 어둠의 터널을 걷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래도 괜찮음'을 느끼게 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녹여낸 아이디어를 타인에 대한 따스함으로 갈무리해낸 그. 나는 비로소 웃음으로 이 청년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속했다. 언젠가 그곳을 찾아올 젊은이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걸으며 귀를 기울이겠노라고. 2년 전 우리가 그러했듯. 어둠의 터널을 건너는 그들의 손을 힘주어 잡아 주겠노라고.
※ 8월 일사일언은 장재열씨를 비롯해 조덕현 이화여대 교수, 이내옥 미술사학자, 이원열 번역가 겸 뮤지션, 정광일 한국애견행동심리치료센터 소장이 집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