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사형집행 지휘한 강찬우 전 검사장
가족 살해 등 흉악범 9명… 마지막 길 목격
"사형 버튼 3개, 어느 것이 작동했는지 몰라"

"나 떨고 있니?"
"아니..."
"그게 겁나. 내가 겁낼까봐..."
"괜찮아..."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형장(刑場)에 선 태수(최민수)는 친구이자, 검사인 우석(박상원)을 불러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태수의 머리에 하얀 천이 덮이고 이내 '덜컹'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러나 실제 사형집행장의 대화는 건조하다.
"이름과 본적, 주소가 어떻게 됩니까"
"법무부 명령으로 형을 집행합니다. 할 말이 있습니까?"

1992년 12월 29일, 그날은 9명의 사형이 집행되는 날이었다. 신군부와 문민정부의 세대 교체를 앞두고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가 14대 대선에서 승리한 지 11일 만이었다. 당시 사형집행 지휘검사였던 강찬우(56·사법연수원 18기) 전 검사장이 ‘그 날’의 일을 들려줬다. 다음은 강 전 검사장의 시점으로 본 그날의 기억이다.

일러스트=정다운

오전 10시쯤 수형자들로 가득 차 있는 서울구치소 사동(舍棟)을 지나 굽이진 복도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마주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발걸음 소리만 메아리처럼 울렸다. 사형장에 들어섰다. 앞에 놓인 긴 테이블에는 구치소장이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오른편으로 함께 간 선배 검사와 나란히 앉았다. 나는 서울지검 공판부 소속의 둘 뿐인 사형 집행지휘 검사였다. 구치소장 왼편에는 검시의(檢屍醫)가 앉았다.

7~8m 앞 떨어진 곳에 3.3㎡ 남짓한 공간 한 가운데 의자가 놓여 있었다. 잠시 후 뒷문이 열리고, 포승줄에 묶인 한 남자가 교도관 손에 이끌려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가슴엔 빨간색 표찰이 달렸다. 이미 자신의 '운명'을 아는 듯 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사형수는 이곳으로 올 때 평소 걷던 길과 다른 길로 온다고 했다.
집행은 구치소장이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었을 때 “없습니다”하고 짧게 대답하는 이가 많았다. “교도관님 감사합니다”라며 지나온 삶을 되짚는 이도 있었다. 어머니를 살해한 김모(당시 34세)씨는 “어머니가 너무 나빴어요. 죽어야 마땅했습니다” 하면서 분을 삭이지 못했다. 아직도 이들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그날 차례로 그 의자를 거쳐 간 사형수는 모두 9명. 연쇄살인, 강도살인, 일가족 살해 등 흉악범들이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 같았다. 사실상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사형수들의 마지막 말은 중간에 끊지 않는 게 관행이었다. 가끔 말을 이어가면서 시간을 끄는 사람도 있는데, 다들 ‘살고 싶어 그러겠지’ 하며 기다려 준다.

‘마지막 기도’의 시간 때는 눈물이 났다. 신부와 목사, 승려가 곁에 가서 손을 잡거나 어깨에 손을 올려 보듬으면 들릴듯 말듯 하는 그들의 기도는 유난히 숙연했다. 기도가 끝나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머리에 천을 씌우고, 천장에서 내려온 줄을 목에 걸었다. 곧 이어 커튼처럼 커다란 천이 내려와 사형수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 명, 한 명 가슴에 손 얹어 사망 확인, 선배의 물음 "억울한 이 없었나?"
'덜컹~'
바닥이 밑으로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너무 조용해서 침도 삼키지 못했던 것 같다.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만 흔들리고 있었다. 교도관 여럿이 동시에 자기 앞에 있는 벨을 누르는데, 진짜 '벨'은 하나다. 부담을 덜어주려고 이렇게 한다는데 그런다고 생명을 거뒀다는 부담이 사라질지...

20분 정도 지났을까 의사와 함께 아래층에 내려갔다. 사망한 게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곁에서 “굳이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고들 했지만 왠지 모를 의무감에 이날 9명의 사형수 집행 후의 모습을 모두 봤다. 한명 한명 심장에 손을 갖다 댔다. 온기는 있었지만 뛰지는 않았다. 모두 숨졌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목이 졸려 죽는 것이 아니었다. 의사는 “바닥이 꺼지면 순간적으로 목이 꺾이면서 숨골이 찔려 즉사하기 때문에 비명을 내지를 틈도 없이 간다”고 했다.

검시의가 사망진단을 내리자 시신은 바로 옆 수술대가 있는 방으로 옮겨졌다. 그들은 집행 전 장기기증에 대한 의사를 밝혔다. 한 두명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장기를 아픈사람들을 위해 써달라고 당부했다고 들었다. ‘남을 해친 죄값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생명을 주고 떠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먹먹해졌다.

그렇게 한 사람당 40여분씩, 차례차례 사형은 집행됐다. 군법무관을 마치고 검찰에 갓 들어온 20대 초임 검사에게 이날은 닥쳐올 험난한 검사의 삶을 예고하는 의식(儀式) 같았다. 사형집행은 오후 늦게 끝났다. 검찰청에 들어오자마자 보고서를 썼다. 한참 후 차장검사가 전화를 걸어 “억울해하는 사람 없었나?”하고 물었다.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무죄를 주장하거나, 진범(眞犯)이 따로 있다고 외치기라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만 맴돌았다. 아찔했던 그 때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그날은 공판부 검사들이 모두 모여 술잔을 기울였다. 선배 검사가 “사형 집행 후엔 액운(厄運)이 따라붙어서 하루를 넘겨 집에 들어가야 한다”며 “검사들은 기(氣)가 강해서 괜찮지만 집에 있는 식구들에게는 좋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신혼이었지만 그는 그날 밤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강찬우는 누구?
'특수통' 검사 출신이다. 대검 중앙수사부 3과장과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1부장, 대검 범죄정보기획관 등을 거쳐 옛 중수부장인 대검 반부패부장을 지냈다. 2015년 수원지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나 현재 법무법인 평산의 대표 변호사로 있다. 진주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