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

여성운동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지난 7일 사법 불평등 중단을 촉구한 서울 혜화동 시위, 10일 온라인 커뮤니티 워마드에 올라온 성체(聖體) 훼손 사진이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여성운동의 방식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시위 중 등장한 과도한 남성 혐오적 발언, 종교적 상징에 대한 반(反)인륜적 공격이 도마에 올랐다. 하지만 젊은 여성들의 행동이 다소 과격할지라도 성 평등을 외치는 이들의 순수성은 정당하다는 시각도 비등하다.

급진적 여성주의 논란은 우리만의 일이 아니다. '얌전한' 여성주의는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나고 있다.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알려진 1963년 '여성의 신비'에서 베티 프리던이 바라봤던 남성, 즉 후안무치 악당이 아닌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남성 이미지는 더 이상 흔적을 찾기 어렵다. 사회와 배우자로부터 이중 압박에 시달리던 가여운 남성의 이미지는 이제 서구의 페미니즘에서 사라졌다.

인터넷 발달과 소셜미디어의 확산이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 깔려있다. 남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스토리로 바뀌고, '찌질한' 남성들의 활약상이 손쉽게 노출되고 조롱의 대상이 된다. 가부장제와 관련된 거대 담화가 아니라 남성들의 말과 행동이 논란의 중심에 선다. 여성을 가르치려는 남성의 태도를 비난하는 '맨스플레인(Mansplain)', 투덜대는 남자들을 겨냥한 '메일티어즈(Male Tears)' 등의 용어가 인터넷에 넘쳐난다.

남성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남성 인권 운동이 국경을 넘어 확산되었고, 이른바 '백래시(backlash·반격)'가 여성의 말과 행동을 비꼬기 시작했다. 백래시는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여혐과 결합하면서 괴물로 변해갔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성인권연대'가 만들어졌고, 일베라는 남성 우월주의 집단이 형성되었다. 이 일부 집단은 여성 혐오를 놀이로 즐기기 시작했다.

올 초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군 '미투 운동'은 성폭력을 겨냥하면서 우리 사회의 남성 중심적 문화에 강력한 균열을 만들었다. 여성 차별이 워낙 견고하고 촛불시위를 통해 정치적 효능감이 커진 탓에 그 범위와 파장은 훨씬 컸다. 국민들은 지지를 보냈고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혜화동에 세 차례 모인 수만 명의 젊은 여성은 여성 피의자에 대한 경찰의 이례적인 신속 수사에 격분했다. 그 저변에는 응답받지 못한 미투 운동에 대한 '원죄'가 깔려있다. 2년 전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고하게 살해당한 여성에 대한 미안함이 자리 잡고 있다. 왜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안에 떨어야 하는지, 왜 임시직으로 내몰려야 하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제 놀이로 시작했던 남성 혐오가 도(度)를 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노인, 성 소수자, 아동, 난민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게임'이라는 허울을 빌어 조롱하는 것은 반인륜적일 뿐 아니라 지지자들을 떠나가게 하는 지름길이다. 흑인 운동이 인종주의에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백인들에 대한 '역(逆)인종주의' 전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순간 고립된다는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젠더 전쟁은 치료가 필요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여성운동은 양심적인 남성을 포용해야 한다. 지원군이 아니라 동등한 목소리와 인간성을 갖는 파트너로 바라봐야 한다. 20~30대 젊은 남성들은 희망 없는 '헬조선'의 같은 피해자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일부 남성은 여성들의 과격성을 볼모 삼아 성 평등 운동의 정당성을 훼손하려는 시도를 당장 멈춰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응답해야 한다. "여성이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는 어느 장관의 말은 응답이 아니라 젠더 전쟁에 무기를 대는 것이다. "편파 수사는 없다"고 단정하기에 앞서 사법 권력기관에 성차별적, 반인권적 관행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경찰뿐 아니라 검찰, 법원 내에도 인권위원회와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해 기관의 인권 감수성을 높여야 한다. 여성을 진정한 파트너로 감싸 안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