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어디서나 '탱고'의 매혹적인 선율이 흐르는 곳
오페라 극장 개조해 만든 서점이 압권… 객석은 서가로 무대는 카페로

형형색색의 건물이 인상적인 데펜사 거리는 원래 가난한 노동자들이 항구에서 쓰다 남은 페인트를 얻어와 칠하면서 형성됐다.

“지금 살는 나라를 제외하고 다른 한 곳에서 살 수 있다면 넌 어디에서 살래?”하는 유치한 질문들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면 난 주저하지 않고 부에노스아이레스라고 말한다. 아르헨티나라고 말하지 않고 부에노스아이레스라고 말한다. 좋은 공기라는 뜻을 가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그다지 공기가 좋지 않지만, 진득한 삶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그 날의 골목들을 떠올리게 한다.

◇ 탱고 한 번 추실까요?

노래도 못하지만 춤은 더 못 춘다. 그래서 노래와 춤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맨 뒷자리이지만, 자주 눈을 크게 뜨고 가장 격렬한 박수를 보낸다.

이 말을 왜 먼저 하냐면 이곳에서 탱고는 좋은 공기와 같으니까. 태양이 무자비하게 쏟아지던 벌건 대낮에도, 벌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어두운 밤에도 어디서나 음악이 흐르면 모든 것이 멈춘다. 열광의 장벽 안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탱고 선율을 밟던 골목. 골목이거나 골목 밖의 일이거나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음악이, 춤이 가장 흔한 일상이 되는 곳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골목 어디를 가더라도 탱고를 만날 수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다면 가장 먼저 걸어야 할 골목이 산텔모(Santelmo) 지역이 아닐까 한다. 아무리 시간이 없더라도 이곳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마침 일요 시장이 열리는 데펜사(Defensa) 거리에서 시작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선택이다. 5월의 광장에서 시작되는 이 자유로운 거리는 식민지 시절 부유층들이 살았던 덕에 우아하고 기품 있는 건물들이 많다.

이 거리에서 처음 탱고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곳뿐만 아니라 산텔모 지역에서 파생되는 골목의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길거리 탱고 공연은 쉽게 만날 수 있다.

나는 데펜사 거리 중간에 나타나는 도레고 광장(Plaza Dorrego)에서 생애 첫 탱고 공연을 봤다. 현란한 기교의 춤사위보다 더 시각적이던 음악. 숨어 지내는 사람이라도 끌려 나올 수밖에 없다. 탱고엔 19세기 이민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말하지 않고 움직임으로 들려주는 춤에서 삶의 애착과 고민이 느껴진다.

◇ 가난한 노동자가 칠한 색색의 골목, 그 자체가 예술

여기, 이 바다 근처의 술집과 사창가에서 태어난 춤. 하지만 길거리 공연에서 보지 못한 근사함을 밤의 클럽이나 밀롱가에서 반드시 확인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 거리의 끝에 개관한 지 10년도 되지 않은 모던 아트뮤지엄과 역사박물관 등이 있다. 하지만 여행자들에겐 전시보다 공연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여행자에게 인사를 건네는 시민들.

역사박물관이 있는 레시마 공원(Parque Lezama)에서 바로 이어지는 거리가 라보까 지역이다. 이 지역의 상징은 까미니또(Caminito) 골목. 형형색색의 페인트로 채색된 낡은 건물들은 건물의 값어치를 떠나 예술적 깊이가 엿보인다.

데펜사 거리보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거주했던 이 골목은 항구에서 쓰다 남은 페인트를 얻어와 칠하기 시작하면서 골목 자체가 거대한 스케치북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색이 몰려와 현란하게 반짝거린다. 2층 난간에서 손을 흔드는 조각품이나 고양이가 낮잠을 자는 화려한 담벼락마저도 모두가 예술품 같다.

◇ 객석은 책장으로, 무대는 카페로… 오페라 극장 개조해 만든 서점에 박수를

처음 걸었던 산텔모 지역의 반대편으로 방향을 잡으면, 이 도시의 가장 번화한 플로리다 거리가 있는 센트로다. 여기서 이어지는 레꼴레타(Recoleta)와 팔레르모(Palermo)지역이다. 레꼴레타에는 여성 운동가 에바 페론이 잠든 묘지가 있다. 에비타(Evita)로 불리던 그녀의 영화적 삶과 헌신을 기리기 위해 이 시간에도 묘지 앞에는 붉은 장미가 놓여 있을 것이다. 1800년대 정원을 개조해 조성한 묘지는, 저명인사들이 안치된 곳으로 각 묘지가 저마다 다른 건물형식으로 지어져 마치 죽은 자의 거대한 도시 같다.

에비타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여성 운동가 에바 페론의 묘지.

이 지역에는 국립미술관을 비롯해 아르헨티나 건축과 예술을 가늠해볼 수 있는 각종 미술관이 이어진다. 그리고 엘 아테네오(El Ateneo Grand Splendid) 서점이 있다. 최초로 유성영화가 상영되었던 거대 오페라 극장을 개조해 만든 서점이다.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객석은 수많은 서적이 진열된 책장이며, 한때 공연이 이루어졌던 무대는 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카페로 변신했다. 오래전, 공연이 시작되면 테라스에서 망원경을 쓰고 공연을 보던 자리에 앉아서 여전히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도시. 낡은 것은 무조건 허물고 거대한 신식 건물 올리기에 혈안이 된 도시에서는 흉내 낼 수 없는 아이디어다.

낡고 오래된 도시에는 없는 게 없는 듯하다. 가장 화려한 것과 가장 평범한 것들이 한군데 몰려 탱고 춤사위처럼 빈틈이 없다. 누군가 말하길 정식 탱고 공연에 서기 위해 한 곡의 춤사위를 몇 년 동안 연습을 한다고 했다. 그렇게 역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어느 것 하나 외면하지 않고 존중되어 온 것이라 가능하지 않을까?

거대한 오페라 극장을 개조해 만든 엘 아테네오 서점. 아르헨티나 최초로 유성영화가 상영됐던 역사적인 곳이다.

아르헨티나 안에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에노스아이레스 안에 아르헨티나와 그 이상의 모든 나라가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좋은 공기란 어쩌면 호흡이 아니라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들로 흡수하는 일, 그것이 내게 자연스러워지면 가장 이상적인 공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PS 왕가위 영화 ‘해피투게더’의 배경이 되었던 ‘바 수르(Bar Sur)’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즐기기 위해선 최소 5일은 잡아야 한다. 대형 공연장과 작은 바에서 이뤄지는 탱고 공연은 꼭 관람할 것.

적어도 5일은 잡아야 대략이라도 마음에라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도착한 날이 주말이 아니라면 5월의 광장이 랜드마크가 되는 센트로 지역(대통령궁, 대성당, 근현대사박물관 비센테나리오, 콜론 극장, 국회의사당, 67m 높이의 오벨리스크 등)부터 시작하면 좋다. 숙소 역시 어느 지역이라도 예산에 맞춰 정할 수 있는 다양성이 있다. 교통도 불편하지 않은 도시다. 152번 버스만 잘 이용해도 어지간한 볼거리는 만날 수 있다. 유명 탱고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숙소에 부탁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미리 예매하는 것이 좋다. 특히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의 배경이 되었던 ‘바 수르(Bar Sur)’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호흡할 수 있는 공연으로 예매가 치열하다. 대형 공연장과 작은 바에서 이루어지는 공연, 이렇게 두 번 정도는 기본으로 권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열광하는 소고기와 와인도 꼭 즐겨보시길.

◆ 변종모는 광고대행사 아트디렉터였다가 오래 여행자로 살고 있다. 지금도 여행자이며 미래에도 여행자일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한 번은 떠나게 될 것이니 우리는 모두 여행자인 셈이므로. 배부르지 않아도 행복했던 날들을 기억한다. 길 위에서 나누었던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들을 생각하며, 그날처럼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짝사랑도 병이다',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