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기메 국립동양박물관 꼭대기 전시실에는 단 한 작품만이 놓여 있다. 한국 화가 김종학(81)이 가로 10m, 세로 2m 크기 캔버스에 설악산의 어느 천변 풍경을 담은 'Primeval Wilderness'(원시림)다. 이름 모를 꽃들과 열매, 새와 벌, 나비와 거미가 빨갛고 샛노랗게, 파랗고 새하얗게 그려져 있다. 와글와글하고 빽빽하다. 꽃과 벌레가 캔버스를 막 비집고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초대형화 단 한 점을 보기 위해 관람객들은 몇 분이고 전시실에 머물렀다. 독일에서 온 레아 힌터메이어(41)씨는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한여름의 산속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그림을 봤어요. 신비스럽고 힘이 넘칩니다. 이런 게 한국의 자연인가요?"
기메 국립동양박물관에서 지난 6일 개막한 김종학 초대전은 198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40여년간 작가가 그린 회화 12점을 전시한다. 작은 규모의 회고전이라고 할 만하다. 기메 국립동양박물관은, 유럽에 있는 아시아 최대 국립박물관으로 명성이 높다. 루브르 미술관에서 이슬람 미술 디렉터를 지낸 소피 마카리우 관장의 취임 이후 아시아 현대미술을 활발히 소개하고 있다. 김종학은 6번째로 초대된 작가다. 마카리우 관장은 "설악의 사계를 담은 김종학의 그림을 보면 한국의 민화가 떠오른다. 한국적 색채를 가장 잘 나타내는 작가다"라고 말했다.
김종학은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일본과 미국에서도 공부했다. 추상화에 몰두하며 30대를 보냈다. 1979년 이혼하면서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가을과 겨울을 보냈다. 그는 "밤에 별과 달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 외로웠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 폭포에도 올랐다"고 했다. 그 순간 그림 100점(點)도 못 그린 아버지를 자식들이 화가로 기억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100점을 못 그려서 살 수 있었던 김종학은 봄이 오자 죽도록 그림을 그렸다. 그가 가장 먼저 그린 것은 할미꽃이었다. "노란색 바탕에 한가운데가 자줏빛을 띤 할미꽃을 보고 감탄했다. '그래, 나를 감동시키는 것을 그리자. 화단에서 나를 어떻게 욕하든 상관하지 말자'고 그때 다짐했다"고 말했다. 풍경을 보면서 그리지 않고, 작업실에 놓인 캔버스 앞에 서서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그린다. "나는 가만가만하게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손이 가는 대로, 무아지경에 빠져 그린다"는 얘기를 느린 말투로 가만가만 말했다.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설악의 사계(四季)를 그리면서 '설악산 작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번 파리 전시에서 김종학이 가장 아끼는 작품은 수세미 넝쿨을 그린 'Vine'(넝쿨·2007)이다. 일부러 심지도 않았는데 마당에서 자라기 시작한 수세미다. 한밤중에도 플래시를 켜고 마당에서 꽃이 피고 지는 걸 봤다. "넝쿨이 돌돌돌돌 벽을 감고 올라가는 모습이 얼마나 재밌고 귀여운지 모른다"고 했다. 두보이스(23)씨는 "파리의 어느 미술관에서도 이런 걸 그린 작품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사실적인 그림인데도 따뜻하고 정감이 있어요. 모든 작품에서 화가가 자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어요."
전시에선 김종학 작가가 소장한 목가구 3점도 선보인다. 1989년 국립 중앙박물관에 300여점의 목기를 기증했고, 박물관에 '김종학실'이 존재할 만큼 그는 수집가로도 유명하다. 전시는 10월 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