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의 '안경'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일본 도쿄법정대학 예과에 입학한 박태원(1909~1986)은 '수염이 얼굴에 주는 영향을 미학적 견지에서 고찰'하고 멋을 따르는 댄디즘(dandyism) 청년이었다. 도쿄 하숙방에서 뒹굴며 소설이나 읽다가 유학을 작파하고 돌아올 때는 일본에서 대유행하는 '갑빠머리'를 하고 나타났다.

박태원은 서울로 돌아와서 이태준·정지용·김기림 등의 '구인회'에 들어가 이상(李箱·1910~1937)과는 단짝 친구로 어울렸다. 둘은 서울 토박이에다 동년배이고 댄디즘, 술과 카페 여급과의 연애에 탐닉 등 취향이 겹쳤다.

게다가 이상이 백부(伯父)의 유산으로 차린 청진동 '제비다방'과 박태원의 '경성부 다옥정 7번지' 집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두 사람은 소공동의 카페 '낙랑파라'를 드나들고, 술과 연애에 빠져 패덕과 일탈의 자유를 누렸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하루 동안 서울의 세태를 관찰하고 되살려낸 '고현학적(考現學的)' 작품이다. '코 위에 걸려 있는 이십사 도의 안경은 그의 근시를 도와주었으나, 그의 망막에 나타나 있는 무수한 맹점을 제거하는 재주는 없었다. 총독부 병원시대의 구보의 시력 검사표는 그저 그 우울한 '안과(眼科) 재래(再來)'의 책상 서랍 속에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주인공 '구보'는 평생 안경 신세를 지는 저주받은 시력을 가진 사람이다.

박태원은 1950년 6·25전쟁 중 서울로 돌아온 이태준과 안회남을 따라 혼자 월북했다. 북한에서 종군기자, 국립고전예술극장 전속작가를 전전하다가 1956년 숙청당했다. 집단농장으로 쫓겨났다가 복귀해 '혁명적 대창작 그루빠'에 소속되어 '갑오농민전쟁'을 썼다. 박태원은 57세 때 그동안 안질환(眼疾患)에 시달리다가 실명(失明)한 뒤 전신불수로 누운 병상에서 구술(口述)로 대하소설을 완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