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정자수입을 許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
발견되는 대로 삭제되지만 건마다 3000~5000명 동의
"동남아 신부는 되고, 덴마크 정자는 안 되나?"
때 아닌 정자 수입 논란, 性갈등으로 보는 시각도

“키 190cm 금발 벽안(碧眼) 덴마크인 정자로 임신할 수 있다면, 임신을 포기하고 기피했던 여성 상당수가 마음을 바꿔 임신을 선택할 것입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중심으로 “정자수입을 허(許)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이 같은 청원을 올리는 이들은 “덴마크 정자를 들여오면 저출산 문제가 해결된다”며 “여자는 아이가 될 정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을 중심으로 “덴마크 남성의 정자 수입을 합법화 해달라”는 논란이 일고 있다. 이들은 “정자 수입은 저출산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서 때 아닌 정자수입 논쟁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지난 21일 처음으로 '덴마크 정자수입'을 요구하는 글이 올라온 이래, 현재까지 세 차례 이상 계속해서 같은 내용의 게시글이 올라온다. 게시글은 건마다 3000~5000명의 동의를 얻고 있지만, 청와대는 '정자수입' 글이 발견되는 족족 삭제에 나서고 있다.

△욕설·비속어를 사용한 청원 △폭력적·선정적인 내용을 담은 청원 △청소년에게 유해한 내용을 담은 청원 △허위 사실이나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이 포함된 청원 등이 청와대 국민 청원게시판의 삭제 규정이다. 정혜승 청와대 뉴미디어비서관은 “원칙에 따라 삭제했다”면서도 ‘정자수입’ 게시글이 구체적으로 어느 항목에 저촉되는지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미혼여성이 외국에서 정자를 기증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기혼여성인 경우에도 까다로운 조건이 따른다. 생명윤리법 24조에 따르면 여성이 정자를 기증 받으려면 법적인 남편의 서면동의가 필요하다. 이것도 남편에게 무(無)정자증이나 유전질환 등이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최지은 보건복지부 생명윤리정책과 주무관은 “국내법상 배아를 생성할 때 법적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야하기 때문에 배우자가 없는 미혼 여성의 경우 정자를 기증받는 게 불가능하다”며 “무엇보다 국내에서는 금전적 대가를 받고 정자를 사고팔 수 없다”고 했다.

덴마크는 정자 거래를 허용하는 대표적인 국가다. 한 산부인과 관계자는 “정자수입을 주장하는 여성들이 유독 ‘덴마크 정자’를 거론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덴마크는 세계 최대 정자은행 크리오스 인터내셔널(Cryos International)을 보유하고 있다. 이 곳에서는 정자 기부자의 국적과 키, 혈액형, 학력, 눈, 머리 색깔 등 모든 정보를 공개, 세계 40여개국에 ‘맞춤형 정자’를 제공하고 있다. 외신들이 “덴마크의 가장 큰 수출 품목은 맥주, 레고 그리고 정자”라고 표현할 정도다. 덴마크 정자의 인기가 치솟자 ‘바이킹 베이비(Viking babies)’라는 말까지 생겼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이들은 “덴마크 정자가 한국인의 그것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더 훌륭하고 우월한 유전자를 선택해서 임신을 하고자 하는것은 임신의 당사자인 여성의 입장에서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권리”라면서 “덴마크인 정자로 임신할 수 있다면 여성 상당수가 마음을 바꿀 것”이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동남아에서 신부도 데려오는데…" 性차별 주장도
여성 권리를 주장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더 나아가 "농촌 총각들 장가보낸다고 동남아에서 '신부'를 데려오기도 하는데 정자는 어째서 안 되는가"라며 성차별이라는 주장도 펼친다. 이들은 농촌 노총각이 국제결혼을 하는 데 나랏돈이 지원된다는 점을 들면서 "미혼 여성의 '아이 가질 권리' 또한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그래픽=김성규 기자
실제 일부 지자체에서는 '미혼 남성 국제결혼 지원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농촌에 거주하는 만 35세 이상 미혼 남성의 국제결혼을 지원해주는 것이다. 결혼과 관련한 비용을 1인당 300만~600만원까지 대준다. 일부 여성들은 "여성들도 매매혼을 지원해달라"며 '덴마크 남성과의 국제결혼을 지원해달라'는 청원을 냈다.

‘정자 수입’ 논란을 페미니즘 운동의 한 갈래로 보는 시각도 있다. “남자는 되는데, 여자는 안 되느냐”는 불만에서 ‘정자 수입’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직장인 최윤미(27)씨는 “개인적으로는 (정자수입을) 할 의향이 없지만 이런 목소리를 내는 것도 한국 사회에서 남성들에 맞서는 하나의 운동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정자 수입’ 논란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의 ‘임신의 자유’가 얼마나 불평등한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면서 “이런 주장을 ‘우월한 백인 유전자’같은 인종주의적 관점으로 보기보다는, 덴마크로 상징되는 ‘북유럽’이 갖는 평등의 이미지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