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말하면 재수 없을 텐데, 솔직히 자신 있었어요. 경쟁자였던 두 사람은 오케스트라 경험이 전무했지만 저는 무려 7년간 악장을 해봤잖아요."

바이올리니스트 박지윤(33)은 엷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새로운 직함은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장. 라디오 프랑스 필은 지휘자 정명훈이 2000년부터 15년간 음악감독을 지낸 프랑스 대표 관현악단으로 지금은 30대 '젊은 거장' 미코 프랑크가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프랑스 페이 드 라 루아르 국립 오케스트라에서 악장으로 일해 온 박지윤은 오는 9월 자리를 옮긴다.

보슬비 흩뿌리던 날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박지윤은 "지금도 자다 깨면 '이게 꿈이야, 생시야' 혼잣말한다"며 웃었다. "2000년 프랑스로 처음 유학 갔을 때 살던 동네가 라디오 프랑스 필 상주 공연장이 있는 파리 16구였어요. 등하굣길에 날마다 버스 타고 지나다니며 '저기서 연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갈망했죠. 2005년 롱티보 콩쿠르에서 입상했을 때도 거기서 연주했는데, 악기 둘러메고 들락날락하는 단원들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몰라요."

박지윤은 “악장은 오케스트라의 심장이자 엔진”이라며 “독주자가 돋보일 수 있게 폭신한 카펫을 깔아주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라디오 프랑스 필이 새 악장을 구한다는 공고가 뜬 건 지난 1월. 기존 악장이던 아모리 코이토가 모딜리아니 콰르텟의 제1바이올린 주자로 옮겨가면서 운 좋게 자리가 났다. 오디션은 3단계를 거쳤다. 최종 단계에서 세 명이 남았다. "객석에 앉아 30분 동안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지켜봤어요. 그러곤 한 사람씩 들어가 모차르트 '마술피리' 서곡과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브람스 교향곡 중 느린 악장을 소화했죠."

박지윤은 마지막 순서였다. "끝나고 나서 프랑크가 대기실로 왔어요. 다들 수준 높았고, 함께 맞춰볼 수 있어 좋았다고 하길래 '아무도 안 뽑겠단 말인가' 낙담했죠. 그때 제 이름이 불렸어요." 단원들이 강당에서 샴페인을 들고 그녀를 축하했다.

물론 더 큰 관문이 남아 있다. 9월부터 석 달간 라디오 프랑스 필과 투어 연주를 한 뒤에야 종신 여부를 알 수 있다. "떨리지만 몰입해서 해낼 거예요. 며칠 전 프랑크한테서 제가 해야 할 연주 프로그램을 받았어요. 고3 수험생처럼 연필을 쥐고 문제집 풀 듯 총보를 공부하고 있지요."

오케스트라는 100명의 개인이 모인 조그만 사회다. 늘 얼굴 맞대고 연습하기 때문에 불협화음이 날 수 있다. 그도 텃세를 이미 겪었다.

"7년 전 페이 드 라 루아르에 처음 들어갔을 때, 동양인 여자애가 악장을 한다니까 단원들이 인사를 안 했어요. 근데 제 별명이 '평화주의자'예요. 지방 투어 갈 때면 베이컨과 치즈 넣은 빵을 만들고 초코칩 쿠키를 구워 상자에 담아 돌렸어요. '당신들은 내게 끼니를 같이하는 식구'란 걸 알려줬죠."

박지윤은 "또 다른 문제에 부닥치겠지만 얼마든지 맞춰낼 자신이 있다"며 "한배를 탄 거니까 그들을 믿고 제 음악을 맡기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