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서유요원전'을 다 읽었다. 뜻밖이다.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일본의 괴기(및 공포) 만화가인데 나는 그런 유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고, '서유요원전'은 무려 14권이나 되기 때문이다.
잘 그린다고 할 수 없는 거친 필체인데, 계속 보다 보니 못 그리는 줄 모르겠다. 이 기괴한 화풍 또한 모로호시 다이지로에게 근접하지 못하게 한 장애물이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빠졌다. 사흘에 걸쳐 열네 권을 다 읽은 거다. 권당 400쪽이 넘으니 6000쪽가량을.
다 캐릭터의 힘이 아닌가 싶다. 이 만화는 소년 만화 내지 모험 만화라고 할 수 있는데, '서유기'를 모델로 한다. 서유기가 어떤 소설인가? '금병매' '삼국지' '수호지'와 더불어 중국의 4대 기서라 부르며, 우리가 익히 아는 손오공과 저팔계와 사오정이 나오는 소설 아닌가? 그리고 서유기는 읽지 않았어도 손오공과 저팔계와 사오정이 어떤 인물인지 알지 않나?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렇다. '서유기'를 읽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모로호시 다이지로판 서유기라 할 수 있는 '서유요원전'을 읽고서는 서유기를 반쯤은 읽은 듯 뿌듯한 느낌에 취해 있다. 반은 모로호시 다이지로라는 걸출한 작가의 능력 덕일 것이고, 또 반은 '서유기'라는 강력한 고전이 주는 포스 덕일 터.
서유기는 현장의 취경(取經) 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현장이 누구냐? 삼장법사다. 경(經), 율(律), 논(論), 이 삼 장에 능통했다 하여 애칭이 삼장법사인 현장은 7세기경 실존 인물로 학승계의 수퍼스타다. 이십 대에 천축이라고 하던 인도에 가 사십 대에 경전을 짊어지고 고국으로 돌아와 경전을 번역한다. 그러는 중에 인도 유람기라 할 수 있는 '대당서역기'도 집필하는 기염을 토한다.(이런 유의 여행기를 쓴 이븐 바투타가 13세기 사람이니 현장이 훨씬 앞섰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오는 데에만 4년이 걸렸다 하니 과연 쓸 말이 넘쳐났겠다 싶다. 이 '대당서역기'가 바로 '서유기'의 모태! 그리고 이 위대한 현장님은 서유기에도 그렇듯 서유요원전에도 등장해주신다.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이 만화를 1983년부터 소년 잡지에 연재해 아직까지 하고 있다. 잡지의 폐간, 연재 중단과 재개 등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현재는 고단샤의 '모닝'에 연재 중이고, 내가 본 애니북스판은 고단샤 레이블을 번역한 것이다. 이분은 1949년생인데, 이야기는 아직 반환점도 못 돈 거 같으니, 부디 건강과 장수를 바란다.
이분께서는 원래 도쿄 전기연구소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다 데즈카상으로 데뷔하는데, 학창 시절 만화를 때려치운 이유가 자기 화풍이 데즈카 오사무의 아류 같아서였다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서유요원전'으로 데즈카 오사무 만화 대상을 받았다는 것.
'사랑'이라고까지는 못 하겠고 내가 이 모로호시 다이지로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가 주인공인 아닌 주변부 인물, 고만고만한 인물에게까지 쏟는 애정 때문이다. 악역도 그냥 악역이 아니게 만들어 미워할 수 없게 만들고, 죽일 때도 최선을 다해, 최적 방식으로 예우하고 있다. 여성 캐릭터도 이런 유의 이야기에 흔히 등장하는 패턴인 소모되거나 착취되는 역이 아니라 웬만한 남자의 오금을 저리게 할 만하게 그렸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인물을 눈여겨보다 결국에는 저팔계마저도 좋아하기에 이르렀다는 이야기.
저팔계가 누구인가? 우리가 아는 거는 일단, 돼지이자 파계승이다. 이 책에서도 그는 어김없이 '욕심쟁이 파계승'이며, 천축에 가겠다는 현장의 말을 '천축'이라는 기방(妓房)에 간다는 걸로 듣고 따라나서는 인물로 나온다.
저팔계에게 당한 자들은 이렇게 말하며 진저리를 친다. "돼지 중놈, 썩어빠진 중놈, 음탕한 중놈, 파계승, 극악무도한 중놈." 그렇다면, 저팔계의 자기소개를 들어보자. "이 어르신이 어떤 분이신 줄 아느냐! 이 저오능 어르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불문에 입문하던 바로 그날부터 살생, 절도, 간음, 망언, 음주를 비롯한 여덟 계율을 모조리 깨버렸다 하여 팔계(八戒)라는 별호를 얻으신 분이시다. 그런 어르신이 네깟 놈들에게 잡힐 성싶으냐!" 저오능이 본명인 속칭 저팔계 선생이 고관의 아내 방에 숨어들었다 발각되자 달아나며 한 말이다.
'오, 멋있는데?'라고 생각했다. 지나온 시간 동안 실언과 음주를 일삼으며 그런 스스로를 책망해온 나로서는 저팔계의 이 기개에 좀 넋이 나갔다. 그러고는 저팔계라는 캐릭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저팔계는 왜 비호감이었나? 외모가 돼지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여자를 좋아하고, 음식을 탐하고, 잠을 못 참고, 욕심이 많아서 그렇지 않은가? 결함이라면 결함이고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저팔계를 손가락질할 자격이 없다. 나도 저팔계니까. 남자를 좋아하고, 음식을 탐하고, 잠을 못 참고, 욕심이 많다. 하지만 저팔계처럼 솔직하지 못해서 '내가 이러이러한데 그게 어쨌단 말이냐?' 할 만한 배포가 없다. 그렇다. 저팔계는 솔직하다. 그리고 욕망에 충실하다. 또 어린애처럼 무구(無垢)하다. 무구해서 무아(無我)인가? 아님, 무아여서 무구한가?
저팔계가 어긴 8계, 그러니까 위반한 여덟 가지 계율이 뭔지 궁금해졌다. 살생하지 않고, 탐욕을 없애며, 음탕한 마음을 없애고, 거짓말하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는 게 5계란다. 이에 좋은 침상을 쓰지 않고, 가무(歌舞)하거나 향수를 쓰지 않고, 정오가 지나면 음식을 먹지 않는 3계란다. 나는 아찔해졌다. 내가 모두, 빈번히, 어겨온 것들이다.
무수한 벌레를 죽였고, 욕심이 지나친 나머지 만용을 부렸으며, 음탕한 상상을 일삼으며, 거짓말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술 없이는 살 수 없다. 이에 더해, 더 좋은 잠자리를 탐하며, 향수 없이는 살 수 없고, 정오는커녕 자정이 지나서도 음식을 먹는 게 나라는 사람인 것이다. 지극히 세속적이다.
저팔계는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다. 고결한 현장과 투지 있는 손오공은 너무나 멋있는 나머지 이 세상에 사는 인물 같지가 않다. 그야말로 신화 속 인물. 여기까지 쓰다 알았다. 내가 저팔계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저팔계는 소설의 인물이다. 갈등하고, 욕망하고, 실수하고, 엉망진창인데, 또 그런 자신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신을 피하지 않고 즐기니 이 아니 멋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