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민주화를 이끈 고(故)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대통령의 전 부인이자 반-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운동가였던 위니 마디키젤라 만델라 여사가 2일(현지 시각) 사망했다. 향년 81세.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위니 만델라는 이날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최근 몇년 간 여러 차례 수술을 받으며 건강이 쇠약해진데다 당뇨병까지 겹치면서 오랜 투병생활을 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위니 만델라는 남아공 정치사에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중 하나다. 만델라 대통령의 27년간 투옥생활 동안 위니 만델라는 남편의 대리인이자, 반-인종차별 지지자들의 대모였으며, 이후 남아공의 민주화를 이끈 여성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격한 인권운동 방식과 소년 납치, 부패 혐의 등으로 비난을 사기도 했다. 그의 역동적인 삶의 여정은 할리우드 영화 ‘위니(Winnie)’로 제작돼 세상에 알려졌다.
◇ 부르주아 출신 사회복지사…넬슨 만나 반인종차별 운동 ‘대모’로
위니 만델라는 1936년 남아공 이스턴 케이프주(州)에 있는 트란스케이의 부유한 엘리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트란스케이의 관료 출신이었으며 어머니는 교사였다. 위니 만델라는 감리교 미션스쿨을 졸업한 뒤 요하네스버그의 한 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이후 미국에서 유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그는 요하네스버그의 한 병원에서 최초의 여성 사회복지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위니 만델라는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흑인 거주 지역의 가난과 유아사망률이 인종차별 때문이라는 것을 연구했고, 이를 계기로 반-인종차별 운동에 뛰어들게 됐다.
위니 만델라가 넬슨 만델라와 운명적으로 만난 것도 이 시점이었다. 넬슨 만델라는 1957년 당시 잘나가는 변호사이자 반-인종차별 운동가였고 둘은 정치적인 동지이자 배우자로 발전했다. 그러나 결혼한 지 7년만에 넬슨 만델라는 1964년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되면서 생이별을 했다.
이를 계기로 위니 만델라는 반-인종차별 운동의 지도자인 남편의 역할을 이어받으며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위니 만델라는 넬슨 만넬라의 석방과 반-인종차별을 주장하며 수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됐다. 남아공 정부는 위니 만델라를 체포해 고문하고 독방에 가두는 등 탄압했지만 그럴수록 그는 남아공 인권운동의 대모로 추앙받았다.
위니 만델라는 1976년 요하네스버그의 한 흑인 거주구역에서 폭동이 일어나 또다시 투옥될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백인들의 두려움의 살아있는 상징”이라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힌 바 있다. 이후 그는 반-인종차별 운동가들의 지지를 받아 의원으로 당선되며 남아공의 민주화에 기여했다.
◇ 인권운동 대모의 또 다른 얼굴
남아공 흑인 인권운동의 대모로 추앙되는 위니 만델라는 과격한 극단주의 성향과 아동 납치, 부정부패로 논란을 사기도 했다.
위니 만델라는 남편 넬슨 만델라가 투옥된 이후 13개월 동안 독방에 투옥돼 고문을 받고, 흑인 거주구역인 소웨토로 추방되는 등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정부에 대한 증오심과 울분이 쌓여갔다. 이 때문인지 1985년 소웨토에서 집으로 복귀한 후 위니 만델라의 반-인종차별 운동은 점점 과격해졌다.
NYT에 따르면, 그는 1986년 연설에서 “더 이상 평화시위는 없다”고 주장하며 경찰을 협박했다. 그는 휘발유를 채운 고무 타이어를 가슴과 팔에 두르고 불을 붙여 즉결 처형하는 ‘죽음의 목걸이(Necklacing)’를 반역자나 경찰에 집행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해 충격을 주기도 했다.
청소년 납치로 유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1988년 소웨토 지역에서 14살 소년이 납치된 후 숨진 채 발견됐다. 해당 소년은 경찰에 위니 만델라와 관련된 정보를 흘린 소년으로 밝혀졌다. 이에 위니 만델라는 1991년 자신의 경호원에게 14살 소년을 납치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징역 5년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부정부패 논란에도 휘말렸다.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 된 후 위니 만델라는 1994년 장관으로 임명됐지만 뇌물 및 정부 자금 횡령 문제로 11개월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2003년 넬슨 만델라의 소속 정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여성동맹 회장으로 역임할 당시에도 부정 대출을 받은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법원은 위니 만델라가 개인적인 사유로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면서 무죄 선고를 내렸다.
◇ 넬슨과 운명적으로 만났지만…
위니 만델라와 넬슨 만델라는 운명적으로 만났지만 결혼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위니 만델라가 21살 되던 해 두 사람은 길 한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넬슨 만델라는 자신의 자서전에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차를 돌려 버스 정류장에서 서있는 위니 만델라에게 다가갔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넬슨 만델라는 위니 만델라보다 18살이 많았고, 세 자녀와 부인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넬슨 만델라는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위니 만델라를 선택했다. 7년 후 불행히도 넬슨 만델라가 투옥되면서 그들은 27년간 이별을 해야 했다.
너무 오랜 세월 떨어져있었기 때문일까. 넬슨 만델라는 출옥한 뒤 1992년 부부가 별거 중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당시 위니 만델라는 영부인이 되고 싶은 욕심에 넬슨 만델라의 별거 제의를 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4년 뒤 넬슨 만델라가 이혼소송에서 위니 만델라가 동료와 바람을 폈다고 증언하면서 38년간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2013년 넬슨 만델라가 사망한 이후 위니 만델라는 유산 쟁탈전을 벌이며 끝내 추악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2016년 그는 넬슨 만델라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그들의 이혼이 법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며 상속을 주장했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위니 만델라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