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역사의 의류업체 '아메리칸 어패럴', 여성복 브랜드 'BCBG막스아즈리아(BCBG Max Azria)', '리미티드', '루21', 영 패션 브랜드 '웻실(Wet Seal)', 아동복 전문 브랜드 '짐보리'…. 이들 패션 브랜드의 공통점은 최근 1~2년 사이 미국 시장에서 파산했거나 파산보호신청(우리의 법정관리신청과 유사)을 했다는 점이다. 이들 중엔 그래도 아직 명맥을 유지하거나 주인이 바뀌어 부활을 꿈꾸는 브랜드들도 있지만 이들이 예전의 영화를 되찾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지난해 문을 닫은 미국의 패션 소매점 숫자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문을 닫았던 7000개를 능가한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더욱이 올해는 더 심각한 침체를 겪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반면, 미국 경제는 엄청난 호황이다. 올 초까지 증시는 사상 최고치 기록을 연일 갈아치웠고 3%가 넘는 성장세가 계속되고 있다. 실업률은 완전고용에 가깝고 소비도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왜 미국 의류 산업은 고전을 면치 못할까. 패션 산업이 근본적인 한계에 도달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스파(SPA)의 약진이 불러온 의류 산업 '디플레이션'
지금까지 정통 패션 산업의 침체를 설명하는 두 가지 요소 중 하나는 '자라', '유니클로', 'H&M' 등 기획부터 생산, 유통, 판매까지 직접 관리하는 스파(SPA) 브랜드, 즉 패스트패션의 약진이다. 또 하나는 아마존으로 대변되는 온라인 유통의 급성장이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정통 패션 브랜드들을 잠식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2000년 미국 내 매장이 10개에도 미치지 못하던 H&M은 지난해 미국 매장이 500개에 달할 만큼 급성장했다. 지난해 H&M의 미국 시장 매출은 32억달러에 달했다. 미국 유통업계가 올해 미국 전역에서 문을 닫을 것으로 예상하는 패션 매장 숫자가 자그마치 8000곳에 달하는 것과 비교하면 패스트패션이 얼마만큼 정통 패션 브랜드들을 잠식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스페인에서 시작한 패스트패션 브랜드 '자라'의 매출도 급성장했다. '바나나리퍼블릭', '갭', '올드네이비' 등을 거느린 정통 패션 회사 갭그룹의 시가총액은 2000년 400억달러에서 최근 100억달러까지 줄어들었다. 반면 자라의 매출은 2004년 50억달러로 갭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다가 지금은 230억달러로 갭의 10배에 달하게 됐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의 약진이 의류 산업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데 한계를 보였다는 것이다.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은 임금이 싼 국가에서 빠른 속도로 대량생산하면서 스스로는 성장했지만 의류 산업 전반에는 '디플레이션'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는 최근 '리바이스 501' 남성 청바지의 가격 추이를 비교해 패스트패션이 정통 브랜드들의 의류 가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했다. 리바이스 501 남성 청바지의 2009년 가격은 58달러였는데 2012년에는 64달러까지 올랐다가 지난해에는 오히려 59.5달러로 내렸다. 현재 의류 가격은 거의 10년 전과 비슷해졌다는 것이다.
◇옷에 돈 안 쓰는 소비자, 가계 지출에서 의류 비중 줄어
패션 산업을 위기로 몰아가는 주요 요인으로 스파 브랜드의 약진과 온라인 유통의 급성장 등 두 가지가 꼽히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스파 브랜드는 성장은 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 성장 속도가 지난 20년래 최저로 둔화되고 있으며, 혁신을 부르짖으며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온라인 의류 유통업체들 역시 심심찮게 파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 속도가 빠르긴 하지만 아마존의 지난해 의류 온라인 매출은 2400만달러 수준으로 시장 점유율로 보자면 아직 미약한 수준이다.
따라서 패스트패션과 온라인 약진 이외에 의류 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블룸버그는 최근 '의류의 죽음(The death of clothing)'이라는 기사에서 의류 산업이 위기를 맞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기본적으로 미국인들이 옷에 돈을 쓰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가계 지출에서 의류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977년 6.2%였는데, 2016년에는 3.1%로 쪼그라들었다. 40년 동안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미디어 콘텐츠·데이터 요금 등이 포함되는 '기술 소비'가 가계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7년에는 거의 0에 가까웠지만 2010년에는 의류를 넘어섰고, 2016년에는 3.4%로 성장, 의류와의 격차를 더 벌렸다.
여행, 음식, 야외 활동 등 '체험' 분야 지출 비중도 1977년 15% 선에서 2016년에는 18%까지 늘어나며 의류 지출을 대체했다. 예쁜 드레스를 사겠다는 사람보다 그 돈으로 여행을 떠나겠다는 사람이 젊은 세대일수록 늘어나고 있다. 또,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시대에 굳이 옷을 많이 사야 할 이유가 줄어들고 있다고 유통업계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출근복과 평상복 등 상황에 따라 다른 옷을 입어야 하는 경우도 줄어들고 있다. 미국의 한 사회연구단체인 조사에 따르면 캐주얼 차림의 출근을 허용하는 직장 비율이 2013년 30% 이하에서 지난해에는 40%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입어야 할 옷의 종류가 줄어드는 것은 의류 소비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트렌드 리드 못 하는 브랜드
패션 산업에서 브랜드와 유통업체, 패션 전문 잡지, 유명 디자이너들은 고객을 선도해 나가는 트렌드세터였다. 그들이 새로운 트렌드를 잡아나가면 고객들은 그 트렌드를 실천해 나가는 충성심을 보였다. 블룸버그는 그런 시장의 역학 구도가 이제는 소비자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소셜 미디어에서 활동하는 고객들은 자신의 개성 있는 패션감각을 활용해 글과 사진을 올리고 경험을 공유한다. 소비자들은 손쉽게 수많은 브랜드들을 비교하고 가격까지 파악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소비자들은 중저가 브랜드에서 구입한 옷으로 패션쇼 런웨이를 장식할 수 있는 수준의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게 됐다는 것이다.
또한 수십 년 전의 의류 아이템과 지금의 아이템에서 디테일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인 혁신을 가져올 수 없다는 점이 디자이너나 브랜드들이 고객들을 끌고 나갈 수 있는 주도권을 차지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지적했다.
이 같은 여러 요인이 의류에 대한 수요를 떨어뜨리고 있기 때문에, 아마존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더 많은 의류 매장이 문을 닫고 심지어 도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