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 캐나다 부처트 가든 정원사·수필가

여행은 기분 좋은 일탈이다. 익숙함이 던져주는 무료함,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사람들의 건강한 충동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 길에서 새로운 것들을 만나고, 그 낯섦에 대한 추억은 돌아온 일상에서 활력으로 전이된다. 그래서일까? 인생은 단조(短調)처럼 차분한 익숙함과 장조(長調)처럼 경쾌한 낯섦이 잘 버무려진 변주곡 같다.

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좀 다르다. 훌쩍 떠난 홀가분한 여행이라기보다는 되돌아갈 일상에 대한 기약이 없는, 기나긴 여행이다. 마치 북미 대륙을 맨발로 횡단하는 '끝없는 행군'에 가깝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낯선 것투성이고 이것들에 적응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탓이다. 그래서일까? 좀처럼 어디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지가 않다. 오히려 그동안 살아가며 조금은 익숙해진 집에서 하릴없이 뒹굴거나 가까운 숲길을 산책하는 게 훨씬 좋다.

이런 나에게 정원은 큰 위안이다. 종종 마주치는 낯익은 꽃들 덕분이다. 손톱에 물을 들이던 봉숭아, 한 움큼씩 따서 입에 넣고 오물거렸던 진달래, 그윽한 향기로 맞아주는 국화가 그렇다. 봄바람에 꽃잎을 날려주는 벚꽃도 반갑고 소담하게 피어난 수국 꽃, 무심한 듯 떨어져 있는 동백꽃도 정겹다.

캐나다 정원에서 샛노란 잎과 꽃술 끝이 빨간 무궁화. 조화(造花)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하루는 동료 정원사가 여러 가지 그래스(grass)로만 꾸며진 화단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날 아침에 시내 화원에서 몇 가지 새 품종을 사왔는데 나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막 심어놓은 한 그래스 앞에 서더니 손으로 가리켰다. 이러저리 살펴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한국이 원산지인 억새였던 것이다. 메뚜기 잡던 고향 마을 뒷산에 지천으로 널려 있던, 가족들과 함께 여행 갔던 제주 산굼부리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던 바로 그 억새였다. 자그마한 풀 한 포기가 그렇게 강한 울림을 던져 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었다.

지금 일하는 부서에서 일을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직원 식당으로 가던 나는 화장실 앞 화단에서 잠시 발을 멈췄다. 처음 일을 시작하던 해부터 유독 나의 눈을 끌었던 무궁화 두 그루가 사라진 것이었다.

"여기 있던 나무들 어디 갔어요?"

같이 가던 수퍼바이저에게 물었다.

"아! 그것들 말이야. 작년에 토템 폴(장승) 뒤쪽 화단으로 옮겼어."

"왜 그랬는데요?"

"민원이 있었어. 어떤 아시아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상징하는 꽃이 화장실 바로 앞에 있는 게 보기 안 좋다며 옮겨달라고 했거든."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는지, 그의 얼굴엔 설핏 귀찮아하는 듯한 기색이 비쳤다.

"20년 이상 뿌리를 내리고 잘 살던 나무를 파낸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지. 처음엔 별일 아니라 여겼는데, 같은 민원이 반복돼 어쩔 수 없었어."

"그래서 옮긴 나무들은 잘 자라고 있어요?"

"웬걸? 하얀 겹꽃이 예쁘던 녀석은 겨울을 못 나고 죽어버렸지 뭐야."

그의 말을 듣고 나자 마치 오랜 벗이라도 떠나보낸 듯 아쉽고 허전했다. 정말 탐스럽게 피던 무궁화 꽃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