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신발'의 변신, 고가에도 매진 행렬
'도가 지나쳐' vs '재밌다' 엇갈린 반응
유희만 좇는 명품 이제 식상해… 희소성·장인정신은 어디로?
지난해 SNS를 강타한 발렌시아가의 200만원대 이케아 쇼핑백을 기억하는가. 트렌드 제조기 발렌시아가의 새로운 ‘장난질’이 화제를 모은다. 이번엔 못난이 고무신 크록스를 ‘손봤다’.
지난 1일 미국 바니스뉴욕 웹사이트에 ‘폼 플랫폼 샌들’이라 명명된 발렌시아가의 신발이 등장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나막신 모양의 고무신 크록스에 10cm 통굽을 단 형태다. 고무의 선명한 색감을 살린 분홍과 베이지색에 알록달록한 지비츠(신발 구멍에 꽂는 액세서리) 장식이 달린 이 신발의 가격은 850달러(약 91만원). 이날 예약 판매를 시작한 발렌시아가의 크록스는 단 몇 시간 만에 동났다.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저렴하고 편한 신발 크록스가 세련된 명품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 크록스에 10cm 통굽 단 발렌시아가 크록스, 예약판매 완판
크록스의 신분 상승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발렌시아가의 크록스가 등장하기 전인 2016년 9월, 2017 봄/여름 런던 패션위크에서 크리스토퍼 케인은 모델들에게 ‘아름답게’ 꾸민 크록스를 신겼다. 그는 ‘수리해 오래 쓰다(Make Do & Mend)’를 주제로 미국의 실용주의와 하이 패션의 기준에 대한 도전을 담았다고 소개했다.
이후에도 크리스토퍼 케인은 자신의 쇼에 크록스를 몇 차례 등장시켰다. 2016년 자갈 장식의 지비츠를 부착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을 붙인 스포츠 샌들 형태의 크록스를 선보였다. 케인은 “왜 크록스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크록스는 못생겼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나는 이점이 오히려 흥미로웠다. 여성스럽지 않고, 편하다”라고 답했다.
크록스는 발렌시아가의 2018 봄/여름 파리 패션위크 패션쇼에 등장해 더 화제를 모았다. 패션쇼에는 나막신 형태의 크록스 클로그에 10cm짜리 통굽을 달고, 발등엔 화려한 플라스틱 장식과 금속 스터드 장식 등을 부착한 크록스가 등장했다. 이미 못생긴 고무신을 보는 것에 익숙했던 비평가들은 발렌시아가의 고무신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몇 달 후 발렌시아가의 크록스는 바니스뉴욕 웹사이트에서 사전예약 판매를 개시하자마자 금세 매진됐다.
2002년 미국 콜로라도에서 탄생한 크록스는 구멍이 뚫린 알록달록한 고무신으로 인기를 끌었다. 원래 장시간 서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됐지만 가볍고 편한 착용감, 저렴한 가격으로 전 연령에 사랑을 받았다. 구멍에 취향대로 장식을 부착하는 커스터마이징도 크록스를 신는 재미. 몇 해 전엔 영국 윌리엄 왕세손의 아들 조지 왕자가 크록스 신발을 신고 왕실 잔디밭을 뛰노는 모습이 파파라치 사진으로 찍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 국내 반응은 미지근… ‘장난만 치는 명품, 이제 식상해’
해외 쇼핑몰에서 완판이 됐다고는 하지만, 명품 크록스를 보는 국내 여론은 미지근하다. 발렌시아가의 국내 웹사이트에서는 ‘폼 플랫폼 샌들’을 예약 판매 중이다. 지비츠 장식이 없는 것은 63만5000원, 장식이 있는 것은 116만5000원에서 125만원으로, 바니스뉴욕보다 10만원 이상 높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기존 크록스 클로그가 5만원 안팎이니, 오리지널과 비교하면 가격이 10~20배 이상 차이가 난다.
인터넷 패션 커뮤니티의 반응도 차갑다. “재미있지만 100만원 넘게 주고 살 가치는 없는 거 같다” “크록스는 뎀나 바잘리아(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도 살릴 수 없다. 그저 못생기고 편한 신발일 뿐” “좋다 좋다 했더니 경계를 넘어버렸다” 등. 한 네티즌은 “이쯤 되면 장난치는 거 같다. ‘이것도 유행하면 비싸게 살래?’라고 조롱하는 느낌”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하찮은 일상품을 사치품으로 탈바꿈하고, 아름다움의 고정관념을 비트는 행위는 최근 명품들이 즐겨 쓰는 창작 방식이다. 구찌는 할머니 옷장에서 건진 듯한 촌스러운 옷을 명품으로 둔갑시켰고, 발렌시아가는 이케아 쇼핑백과 봉투를 모방해 값비싼 명품 가방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재미와 자극만을 추구하는 명품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트렌드 전문가 A씨는 “발렌시아가가 만든 것이기에 그럴싸 해보인 것뿐”이라며, “세상의 모든 것을 비트는 발렌시아가의 재치는 칭찬할 만하지만, 유서 깊은 패션 브랜드가 유희적인 이미지로만 과도하게 소비되는 것은 아쉽다”라고 말했다.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는 한 인터뷰에서 “하이패션은 품질과 장인정신에서 독창성에 중점을 두는 추세다. 젊은 세대들은 전통적인 브랜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뛰어난 완성도보다 눈에 띄고 특별한 무언가를 찾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주장대로 최근 명품은 독특함을 추구한 나머지, 전통과 품격을 갖추는 데는 다소 소홀한 태도를 보인다. 발렌시아가의 경우 인기 상품인 ‘트리플S 스니커즈’의 생산 공장을 이탈리아에서 중국으로 슬쩍 이전한 것이 문제가 됐다. 원산지 이전에 대한 공지 없이 가격은 그대로 유지해 소비자들의 비난을 샀다.
한편, 크록스는 명품과의 만남을 통해 패셔너블한 이미지가 더해졌다. 지난해에는 크리스토퍼 케인과 협업한 클로그를 6만원대에 내놔 패션 애호가들의 호응을 얻었다. 올해도 발렌시아가와의 협업 신발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크록스 측은 “계획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