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디지털 증거' 새 가이드라인 제시
… 수사 지연 등 수사기관 불만 감안한 듯
"압수 이후 과정까지 참여권 있는 것 아냐"
단 범죄혐의 외 압수 관행은 여전히 안돼
수사기관이 압수한 디지털 증거를 복사하거나 출력하는 과정에까지 피의자를 참여시킬 필요는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관계자는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을 엄격하게 다루면서도 수사 실정을 감안해 디지털 증거 수집에 대한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라고 했다.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유흥업소 매출을 축소 신고해 86억원을 탈세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3년에 벌금 90억원을 선고받은 된 황모(59)씨 등에 대한 상고심에서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을 잘못 판단했다”며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3일 밝혔다.
대법원은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CD에 저장된 파일과 출력물이 황씨 등의 매출장부가 담긴 USB의 원본파일을 그대로 복사했는지가 확인되지 않아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한 원심 판단은 잘못”이라며 “장부를 작성·관리한 경리직원이 ‘내가 작성한 것이 맞다’고 진술한 것만으로는 같은 것으로 보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디지털 증거가 원본과 동일한 것인지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를 없앨 정도’로 검찰이 입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날 판결에서 대법원은 “수사기관이 영장 범죄사실과 관련된 정보를 선별해 복제·생성한 파일을 제출받았다면 압수수색 절차는 적법하게 종료된 것”이라면서 “이후 수사기관이 사무실에서 압수물의 사본을 탐색하거나 복사·출력하는 과정에까지 피의자 등에게 참여 기회를 보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적시했다. 대법원은 또 “수사기관이 압수목록을 작성해 건넬 때 반드시 서면이 아니라도 전자파일 형태로 복사해주거나 이메일로 전송하는 방식으로 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디지털 증거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2015년 이른바 ‘종근당 판결’에서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에 대한 입장을 정리한 바 있다. 당시 판결은 수사기관은 압수수색 절차 전반에 걸쳐 피압수자의 참여권 보장을 강화하라고 했다. 디지털 증거는 사본 생성이 쉽고, 내용을 고칠 수 있는 위험도 있다는 취지였다. 압수수색을 할 때 영장 범죄사실의 범위를 넘어서는 정보를 ‘일단 들고 오자’는 식의 관행에 제동을 건 것이었다.
그러나 검찰 등 수사기관은 디지털 증거를 분석·열람하는 과정까지 피의자나 변호인을 참여시키려다보니 수사가 지나치게 더뎌진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검찰 안팎에선 압수수색의 적법 절차를 중시하는 방향은 옳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수사 실정을 외면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런 논란에 대해 대법원이 압수수색과 관련해 피의자의 참여권에 대한 범위를 어느정도 정해준 셈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수사기관의 실정을 감안해서 피의자의 참여권을 규정한 첫 판결”이라며 “앞으로 재판에서는 수사기관이 범죄혐의와 관련된 정보만 선별해 압수했는지, 압수 후 복사하는 과정에서 원본과 동일한 지 여부 등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황씨는 다른 사람 명의로 부산에서 유흥주점을 운영하면서 가짜 장부 등을 만들어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약 4년 동안 총 86억원 상당의 조세를 포탈한 혐의로 2015년 기소됐다. 1심은 황씨에게 징역 4년에 벌금 90억원을 선고했고, 2심은 “범행을 자수·반성하고, 탈세액 상당 부분을 납부했다”며 징역 형량을 3년으로 낮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