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남자는 한여름에도 긴 팔 정장 셔츠, 여자는 긴 치마에 패티코트 입고 경기
점차 귀족 패션에서 활동적인 피케 셔츠로… 윔블던은 여전히 '흰색'으로 색상 규제
이후 라코스테가 피케 셔츠 대중화, 여성은 짧은 주름치마로 정착

△정현 선수가 22일 멜버른에서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남자단식 16강전 노박 조코비치와의 경기에서 이기고 기뻐하고 있다. 그가 입은 피케 셔츠는 라코스테 제품./사진=라코스테
한국 테니스 간판 정현 선수가 한국인 최초로 호주 오픈 4강에 진출하면서 테니스에 대한 관심 높아지고 있다. 신세계몰은 정현 선수가 노박 조코비치를 꺽고 8강 진출을 확정 지은 지난 22일부터 28일까지 테니스 관련 매출이 전주 대비 50% 이상 늘었다고 30일 밝혔다. 테니스화는 55.3%, 테니스용품의 매출은 36.1% 늘었다.

갑작스러운 열풍 같지만, 알고 보면 테니스는 이미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입는 패션 아이템만 봐도 테니스 운동복에서 유래된 것이 많다. 남자라면 연령을 불문하고 한 두 장씩은 갖고 있을 피케 셔츠(일명 폴로셔츠), 걸그룹들이 즐겨 입는 짧은 주름치마, 납작한 밑창의 흰색 스니커즈 등이 그것. 귀족 스포츠를 대표하는 테니스복은 어떻게 우리 옷장 속으로 들어왔을까?

◇ 귀족들의 사교 문화로 출발한 테니스, ‘백색 스포츠’로 권위 이어

테니스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11세기경 프랑스의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 성행하였던 라뽐므(la paum)를 시초로 본다. 16세기 들어 라켓을 사용해 공을 치는 쥐드폼(Jeu de paume)이 프랑스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 퍼졌고, 이것이 영국에 전해져 왕실의 유희로 보급됐다. 1877년 영국의 헨리 존스가 윔블던 크로켓 클럽에 소개해 테니스 대회를 개최한 것이 오늘날 윔블던 대회로 발전한다.

테니스를 흔히 ‘백색 스포츠’라고 부르는데, 이는 백인들의 전유물이란 의미와 복장의 색상 제한의 의미를 지닌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테니스는 귀족에게만 허용된 사교 문화였다. 하지만 1957년 미국 흑인 선수 알데아 깁슨이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인종 차별적 의미는 사라졌다.

△2017 윔블던 테니스대회 여자 단식에서 우승한 스페인 가르비네 무구루사, 경기 규정에 맞춰 흰색 경기복을 입고 결승전을 펼치고 있다./사진=윔블던 페이스북 페이지
테니스를 칠 때 보통 흰색 복장을 떠올리는데, 그 이유는 세계 4대 테니스 경기 중 하나인 윔블던 챔피언십의 엄격한 복장 규정 덕분이다. 윔블던은 선수들의 유니폼과 모자, 신발, 양말, 심지어 속옷까지 흰색을 입도록 권장한다.

윔블던의 깐깐한 복장 규정은 일부 선수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긴 머리를 묶고 섹시한 옷차림을 즐겼던 미국의 안드레 아가시는 규정에 반발해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윔블던에 불참했다. 윔블던 외 경기에서는 흰색을 입어야 한다는 복장 규정이 없지만, 여전히 많은 선수가 흰색 유니폼을 착용한다. 흰색은 초록색 코트 위에서 가장 돋보이는 색이기 때문이다.

◇ 테니스 선수가 고안한 피케 셔츠, 클래식 캐주얼의 대명사로

여름이면 흔히 입는 피케 셔츠, 일명 폴로셔츠는 원래 테니스 선수가 고안한 기능성 운동복이었다. 1926년 US 대회에서 프랑스 테니스 선수 르네 라코스테가 입은 이후 대중화됐다. 당시 남자 선수들은 한여름에도 긴 소매의 정장용 셔츠를 입고 경기를 했다.

불편함을 느낀 르네 라코스테는 폴로 선수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반소매에 칼라를 달고 바람이 잘 통하는 저지 피케(Jersey piqué) 소재를 적용해 운동 셔츠를 개발했다. 실용성과 우아함을 갖춘 피케 셔츠는 테니스 선수들에게 환영받았고, 폴로 선수들에게까지 퍼졌다. 르네 라코스테는 1933년 패션 브랜드 라코스테를 설립했다. 라코스테는 브랜드의 정통성을 반영해 현재 노박 조코비치, 정현, 줄리앙 베네토 등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들을 후원하고 있다.

△호주 오픈대회에서 정현이 착용한 라코스테 피케 셔츠(왼쪽)와 폴로의 폴로셔츠/사진=각 브랜드
피케 셔츠는 테니스 셔츠에서 시작됐지만, 현대엔 폴로셔츠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1972년 미국 패션 디자이너 랄프로렌이 '폴로'라는 캐주얼 라인을 발표하고 피케 셔츠를 내놓은 이후 미국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직장인과 대학생들은 테니스나 폴로를 즐기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폴로셔츠를 입기 시작했고, 이는 '아메리칸 캐주얼'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게 된다.

◇ 걸그룹의 짧은 주름치마, 여성용 테니스 운동복이 시초

최근 10~20대 여성들 사이에서 테니스 스커트가 큰 인기를 끌었다. 짧은 주름치마 형태의 테니스 스커트는 청순하면서도 활동적이고 건강한 이미지를 동반하기에 걸그룹의 필수 패션 아이템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1884년 윔블던에 처음 여자 대회가 생겼을 때만 해도 여자 선수들은 긴 치마에 코르셋(Corset·허리를 가늘게 조인 몸매 보정 속옷)과 페티코트(Petticoat·치마를 부풀리기 위해 빳빳한 천으로 만든 속치마)를 입고 경기했다. 왕실 주최로 열리는 경기에서 우아함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1921년 프랑스 선수 수잔 렌글렝은 코르셋과 페티코트를 벗고 종아리를 드러낸 주름치마에 카디건을 입고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이 경기복은 디자이너 장 파투가 만든 것으로, 편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세련된 옷차림이었다. 수잔은 윔블던 대회에서 6번이나 우승을 거두며 테니스 영웅이 됐다.

△1920년대 수잔 렌글렝이 처음 테니스 경기복으로 착용한 주름치마(왼쪽)와 걸그룹 f(x) 멤버 크리스탈이 입어 인기를 끈 테니스 스커트/사진=인터넷 커뮤니티
지금과 가장 유사한 테니스 패션은 1949년 윔블던 대회에 출전한 미국 선수 구지 모란의 복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짧은 스커트와 레이스 장식이 된 속바지를 입고 대회에 등장했다. 이후 짧은 치마와 속바지를 덧댄 여성들의 테니스 패션은 테니스 경기에서 하나의 관람 포인트로 자리 잡았다.

◇ 복고·스포티즘 열풍에 테니스화 인기

바닥이 평평하고 목이 낮은 테니스화는 주로 흰색 천이나 가죽으로 만든다. 깔끔하고 고전적인 디자인으로 어떤 옷과 매치해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최근 몇 년 사이 스니커즈 시장에는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유행했던 테니스화를 재해석한 코트화가 큰 인기를 끌었다. 휠라가 2016년 10월 출시한 ‘코트디럭스’는 지난해 말 판매량 100만 족을 돌파했으며, 뉴발란스의 ‘CRT300’, 리복 코트화 ‘클럽 C 오버브랜디드’ 등도 인기를 끌었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복고 열풍과 스포티즘이 맞물린 결과”라 해석했다.

△스포츠 브랜드 헤드의 '테니스 신드롬' 이미지/사진=헤드
패션업계에는 테니스를 주제로 한 브랜드와 아이템이 유난히 많다. 귀족 스포츠라는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세련되고 간결한 스타일이 대중에게 통했기 때문이다. 테니스 선수가 직접 만든 브랜드인 라코스테와 프레드페리를 비롯해 아디다스의 '스탠스미스', 컨버스의 '척 테일러' 운동화도 테니스 선수의 이름을 따 만들었다. 테니스 라인을 전략적으로 선보이기도 한다. LF의 캐주얼 브랜드 헤지스는 영국 윔블던 챔피언십과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윔블던 라인'을 선보이고 있으며, 코오롱인더스트리FnC부문이 전개하는 스포츠 브랜드 헤드는 테니스의 영감을 1990년대 스타일로 푼 '테니스 신드롬'을 판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