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주가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진 29일 낮 12시 30분쯤 서울 중구 서울역파출소로 한 노숙인이 들어왔다. 무릎 아래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바지에 고무장화 차림이었다. 노숙인은 경찰관에게 "컵라면 있어?"라고 물었다. 그는 경찰관이 물을 부어 건넨 라면용기를 받아들고 민원인용 의자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다른 의자에는 시커먼 옷을 껴입은 노숙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대뜸 한 경찰에게 손을 내밀며 "담배 한 개만!"이라고 요구했다. 담배를 쥐여준 경찰이 "여기 오래 계셨다"고 했더니 "나한테 왜 이러느냐"며 고함을 쳤다. 사건을 접수시키러 왔던 성모(23)씨는 "여기가 노숙인 쉼터는 아니지 않으냐"며 얼굴을 찌푸렸다.
최근 한파가 길어지면서 경찰서가 때아닌 노숙인의 방문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노숙인들은 강추위를 피해 일선 지구대나 파출소로 들어가 '라면 달라' '커피 달라'고 요구한다. 민원인에게 시비를 걸거나 담배 등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기도 한다.
29일 오후 서울역 맞은편 남대문경찰서에는 몸을 녹이러 들어온 노숙인 대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대부분 술에 취해 경찰이나 민원인에게 행패를 부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서울 용산의 한 지구대 관계자는 "노숙인이 사건 관계자 조사 중 불쑥 들어와 구경을 해 업무에 방해가 됐다"고 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노숙인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시민들에게 분풀이를 하기 때문에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일부 노숙인들은 경찰서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간다. 대상은 주로 경찰이 빨아놓은 옷이나 각종 화장실 비품이다. 민원인을 위해 비치된 신문을 뭉텅이로 들고 가기도 한다.
노숙인들이 갈 곳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남대문경찰서 인근에 '노숙인 쉼터'가 있다. 그래도 경찰서를 찾는다. 서울역의 한 노숙인은 "경찰이 담배도 주고 음식도 주니까 경찰서가 더 좋다"고 했다.
노숙인 쉼터 관리자는 "노숙인 쉼터는 원래 술을 마시면 출입을 못하지만 서울역 일대에는 노숙인이 너무 많아 싸우지만 않으면 받아준다"며 "쉼터에서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다 쫓겨난 이들이 경찰서로 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경찰서로 모여드는 노숙인 때문에 인근 상인들도 괴로움을 호소한다. 남대문경찰서 옆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한 사장은 "경찰서에 들렀던 노숙인들이 카페 밖에 둔 손님용 의자까지 훔쳐간다"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무작정 나가라고만 하기도 어렵다"며 "이런 날씨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참 난감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