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성·안현수·심석희·최민정… 쇼트트랙 역사 함께 쓴 스케이트 장인
석고로 발 본떠 수작업, 한 달에 4켤레만… 독학으로 세계적인 명성 얻어
평창에선 한국, 미국, 중국, 일본 선수들이 그의 스케이트 신어
48년째 스케이트를 만들어온 유오상 장인은 국내 빙상 스포츠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에 난감한 심정을 드러냈다. 올림픽 때마다 매번 같은 얘기를 하는 게 식상하고, 누추한 작업환경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23일 서울 노원구 월계동 삼덕스포츠 사무실에서 유오성 장인을 만났다. 몇 차례 인터뷰를 고사하던 장인은 스케이트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목소리가 높아졌다. 67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활기찬 모습이었다.
◆“아저씨가 만들어주면 신을래?” 독학으로 만든 스케이트로 세계무대 석권
장인은 19살에 서울 동대문의 한 스포츠 신발 업체에서 견습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축구화, 야구화, 육상화 등 다양한 스포츠화를 만들었다. 스케이트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빙상 선수들이 스케이트를 수선하러 장인을 찾아오면서다. 선수들은 외국산 스케이트가 잘 맞지 않아 통증을 호소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동성 선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아저씨가 꼭 맞는 신발을 만들어주면 신을래?” 장인의 말에 김 선수는 “그러겠다”고 답했다.
장인은 그 길로 스케이트 연구에 들어갔다. 못쓰게 된 스케이트를 얻어 분해하고 독학으로 스케이트를 연구했다. 재료를 찾는데 6개월, 공법을 개발하는데 8개월, 총 1년 4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장인이 만든 스케이트를 신은 김동성 선수는 1998년 나가노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이후 국내외 간판선수들이 장인을 찾기 시작했다.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 2관왕을 거머쥔 이정수 선수, 스피드스케이팅 1만m에서 금메달을 딴 이승훈 선수도 그의 스케이트를 신었다.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에서는 쇼트트랙 메달리스트 절반 이상이 장인이 만든 스케이트를 신어 화제를 모았다. 현재 20여 개국의 선수들이 그가 만든 신발을 신고 얼음 위를 달린다.
◆ 딱딱한 스케이트, 코르셋처럼 딱 맞아야… 0.5mm 오차도 기록에 영향
선수들이 신는 스케이트는 돌처럼 딱딱하다. 스케이팅할 때 추진력을 높이기 위해 뒤축과 바닥에 카본(Carbon, 정식 명칭은 파라 아라미드) 소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카본은 자동차나 자전거, 테니스 라켓 등에 쓰이는 소재로 매우 견고하다. 그래서 발 모양에 딱 맞지 않으면 통증이 심해 제대로 경기를 할 수 없다. 그만큼 제작과정에서 섬세하고 정교한 솜씨가 요구된다.
몰드(mold, 금형) 스케이트화는 제작 기간만 25일이 걸린다. 선수의 발을 석고로 뜨는 것부터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한 달에 4켤레밖에 생산하지 못한다. 맞춤형 스케이트의 가격은 한 켤레에 250만원, 기성 스케이트화는 170만원 정도다.
“얼굴처럼 발 모양도 생김새가 다 달라요. 코르셋을 조이듯 발과 스케이트 사이에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잘 맞춰야 합니다. 맨눈으로 오차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손의 감각이 매우 중요하죠.” 장인이 지금까지 수작업을 고집하는 이유다.
◆ 김동성·안현수·심석희… 국가대표 ‘발’ 책임진 금손
내로라하는 선수들의 발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인터뷰 중간 스마트폰에 저장된 선수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선수 한명 한명과의 추억을 늘어놓는 장인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안현수 선수도 그가 아끼는 선수 중 한 명이다.
“전이경 선수가 스케이트를 맞춰놓고 은퇴해 스케이트를 보관하고 있었죠. 당시 초등학생이던 안현수 선수가 스케이트를 맞추겠다고 와서 그 신발을 신겨봤는데 딱 맞았어요. 그 후 안 선수의 기량이 엄청나게 좋아졌죠. 지금까지 우리 부츠를 신고 뛰고 있어요.”
인터뷰가 있기 전날, 러시아 쇼트트랙 대표팀 소속의 안현수 선수가 러시아 도핑 스캔들에 연루돼 평창동계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게 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장인은 자기 일처럼 슬퍼했다.
“안 선수는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천재예요. 체력도 좋고 머리도 영리하죠.” 그는 안 선수의 초청으로 러시아에 방문한 적이 있다. “러시아 선수촌에서 어렵게 생활하며 선수 생활을 하는 걸 지켜봤습니다. 이번 올림픽에 출전한다고 해서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와 너무 안타까워요.” 장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 평창서 생애 첫 올림픽 관람 “기쁘고 설레”
장인은 다음 달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 결승전을 직접 관람할 예정이다. 48년간 스케이트를 만들었지만, 올림픽 경기를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만큼 설레고 기대가 크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등의 국가대표 선수들이 그의 스케이트를 신고 뛴다. 국내 선수로는 최민정, 황대현, 김도겸 선수가 장인이 만든 스케이트를 신고 경기에 나선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아직 자신을 이를 후계자를 찾지 못했다. “우리 공장에서 일하는 가장 젊은 직원이 60세입니다. 매스컴에 몇 번 나오니 배우겠다고 찾아온 청년들도 있었는데, 우리가 일하는 걸 보고 도망갔어요. 종일 화학약품 냄새를 맡으며 구부리고 일하려니 겁이 났겠죠.”
장인은 지난해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6개월은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한 달도 안 돼 작업을 재개했다. 제때 재활을 하지 못해 후유증이 심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선수들을 보면 은퇴할 엄두가 안 난다.
“너무 힘들어서 소치동계올림픽까지만 일하고 그만두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번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황대현 선수가 ‘저 올림픽 갈 때까지 하셔야 해요’하고 붙잡는 바람에 지금까지 왔죠. 평창이 끝이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웃음). 아마 절 기다리는 선수들이 있는 한 계속 스케이트를 만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