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작가 하일권(36)의 만화는 이상하다. 취업 못한 백수가 알고 보니 '때밀이 천재'라든지(목욕의신), 연애에 젬병인 남자가 '수퍼 정자(精子)'라는 초인적 능력을 이용해 악당과 싸운다(스퍼맨). 금수저 모범생은 자신이 수영복에 집착하는 변태로 소문나자, 수영복을 실컷 볼 수 있는 수구(水球) 선수가 된다(두근두근두근거려). 배경은 현실적인데, 설정은 허무맹랑한 판타지다. 그 괴리감이 너무 커서 웹툰을 보는 내내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공포의 외인구단' '달려라 하니'처럼 비범한 인물의 성공기가 인기를 끌었던 1980~90년대 만화와 확실히 궤가 다르다. 상상치 못한 설정으로 독자를 당황하게 한 뒤 그 틈에 메시지를 담아내는 게 그의 방식. '스퍼맨'을 통해 성(性)을 금기시하는 사회에 딴지 걸고, '목욕의신'을 통해 세상의 편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때밀이에 도전하는 이들의 장인 정신을 그린다.
만화책보다 웹툰이 읽기 편한 세대는 그의 이상한 메시지 전달 방식에 열광한다. 정색하고 던지는 돌직구보다 넌지시 건네는 변화구를 더 선호하기 때문일 테다. 10~30대 독자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 웹툰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하일권을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만났다.
―이상한 사람인가?
"하하, 아니다. 만화를 보고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하는 분이 많다. 사실은 아주 평범하다. 독특한 주제의 만화를 그리는 건 단순히 재미있기 때문이다. 재미를 추구하는 게 만화고, 재미란 익숙한 것들에서 이질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박적으로 찾게 된다. 일상에서 엉뚱한 것을 생각하는 게 직업병이 됐다."
―웹툰만 두고 보면 아주 독특한 인생을 살아왔을 것 같은데.
"반대다. 너무 평범해서 웹툰 작가가 됐다. 특별할 것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처음부터 만화가가 꿈이었던 것도 아니다. 일단 대학은 가야겠다 싶어 고2 때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 집, 학교, 미술학원이 인생의 전부였다. 답답하고 우울해서 연습장을 꺼내 만화를 그렸다. 상상으로 독특한 일탈을 꿈꿨다."
―그때 만화가가 되겠다고 다짐했나?
"입시가 끝나고 미술학원 추천으로 전망 좋은 산업디자인과와 시각디자인과를 중심으로 지원했다. 좀 짜증이 나더라. 시키는 대로 살아왔는데, 이거 하나만큼은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화로 생각했던 반항을 현실에 그렸다. 애니메이션 학과로 진학했다."
―무미건조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아이러니하게 작품의 단골 무대가 학교다.
"무채색으로 보낸 시간이라 나도 모르게 상상력으로 채색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왕따를 당하는 학생에게 여자 로봇 짝꿍이 생긴다든지(3단합체김복남), 못생긴 여학생이 마법을 부리는 꽃미남 이발사를 친구로 둔다든지(삼봉이발소)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작품에 첫사랑, 짝사랑 등 풋풋한 멜로 얘기가 계속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남중·남고를 나온 탓에 그 시절 사랑을 못해봐 상상력이 폭발한다(웃음)."
―독자들이 왜 하일권 만화에서 매력을 느낀다고 생각하나?
"현실이 불만족스러울수록 사람들은 상상력을 이용해 탈출구를 찾는다. 한국에서는 입시, 취업, 집, 결혼이라는 쉽지 않은 과제가 끝없이 쌓여 있지 않나. 만화라는 판타지로 잠시나마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래서 내 만화 속에서 그려지는 말도 안 되는 일탈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다."
―학생들 장래 희망 순위권에 항상 웹툰 작가가 꼽힌다.
"2006년 데뷔했을 때만 해도 '웹툰 그릴 시간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라는 얘기를 들었다. 초창기 웹툰은 무료였고, 만화책에 비해서 질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리고 실제로 시급도 편의점 아르바이트보다 적었다. 그런데 요즘은 격세지감이다. 웹툰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웹툰 작가에 대한 인식도 180도 바뀌었다. 당시만 해도 웹툰 작가가 이렇게 대접받는 직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웹툰 작가의 일상은 어떤가?
"역동적이거나 화려하지 않다. 연재를 시작하면 오전 9시에 일어나 작업실로 출근하고, 자정쯤 집으로 들어간다. 가장 특별한 이벤트가 밥 먹는 일이다(웃음). 삶은 적막한데 머릿속은 24시간 상상력을 발휘하느라 시끄럽다. 이 때문에 건강관리가 힘들고, 우울증이 오는 경우도 많다. 지루한 싸움을 견뎌내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공한 웹툰 작가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운이 좋았다. 나 때만 해도 지금처럼 그림과 글에 재능 있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웹툰에 도전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덕분에 이제 노력만으로는 주목받는 웹툰 작가가 되기 어려워졌다. 남과 다른 확실한 뭔가가 있어야 한다. 트렌드를 읽는 눈이라든지, 특유의 '똘끼'라든지."
그는 지난 10일 웹툰 '마주쳤다'의 연재를 끝냈다. 인공지능(AI)과 증강현실(AR)을 접목해 독자를 만화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국내 최초 인터랙티브 웹툰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8부작 웹툰인데 누적 조회 수가 4000만 건을 넘었다.
―'마주쳤다'가 엄청난 화제 속에서 막을 내렸다.
"처음 네이버에서 인터랙티브 웹툰 작업 제의가 들어왔을 때 건강이 안 좋아 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독자가 '셀카'를 올리면 AI가 웹툰 속 캐릭터로 바꾸어 주고, AR을 통해 웹툰 속 주인공들이 현실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기술이 너무 신기했다. 웹툰 시장이 불법 복제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는데, 인터랙티브 웹툰이 이를 해결해 줄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제안을 받아들였다. 쉽지는 않았다. 30부작 중편 웹툰도 3개월이면 기획이 끝나는데, 8부작 단편 웹툰을 기획하는 데 10개월이 걸렸다. 독자들이 인터랙티브 웹툰에 적응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예상외로 반응이 크더라."
―반응이 뜨겁지만 좋은 반응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사실이다. '생김새가 마음에 안 든다' '난 여잔데 왜 남자 캐릭터냐' '내가 주인공인데 내가 끌고 가고 싶은 스토리 방향이 아니다'는 식의 반응도 많았다. '마주쳤다'는 어디까지나 작가가 스토리텔링을 하는 웹툰인데,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는 게임으로 여기는 독자가 많았다. 독자를 생각하며 주인공을 그리려다 보니 제약이 많았다. 기술적인 문제로 웹툰에 주인공의 정면 모습만 나와야 했던 것도 문제다. 기술자들과 함께 앞으로 극복해 나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다음 작품도 이상한가?
"다음 작품은 그린 웹툰 중 가장 이상하다고 평가받는 '스퍼맨'의 시즌 2다. 장기적으로는 '이상한 가족' 얘기를 한번 그려보고 싶다. 3대가 한집에 모여 사는 대가족 이야기다. 20년 전만 해도 평범한 이야기였는데, 점점 가족이 해체되며 대가족이 없어지고 있지 않나. 조만간 대가족 얘기가 이상한 얘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독자들이 "이 웹툰 정말 이상한데?"라고 생각할 만화를 계속 그리는 게 목표라 했다.
◆하일권 프로필
1982 서울 출생
2000 세종대 애니메이션 학과 입학
2006 웹툰 '삼봉이발소'로 데뷔
2008 대한민국 만화대상 신인상
2011 웹툰 '목욕의신' 연재
2012 부천만화대상 우수 이야기 만화상
2016 웹툰 '스퍼맨'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