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심리연구가인 질 비알로스키는 21세 동생을 자살로 잃었다. '너의 그림자를 읽다' 부제에 등장하는 '자살 생존자'란 자살로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이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뜻한다. 동생의 무덤 앞에 서서 그녀는 생을 관통하는 질문을 던진다. 어째서 나는 동생의 죽음을 막지 못했는가! 곧 동생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한 길고 험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그녀는 가족의 역사와 의무기록, 일기 같은 개인적인 자료를 수집하며 동생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도착한 곳은 자살 연구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슈나이더만 박사였다.
"슈나이더만 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죽은 사람의 의도를 심리학적으로 재구성하는 이른바 '심리적 부검'을 통해 자살 행동과 연관된 심리적 측면을 밝혀냈다. 이러한 재구성은 개인적 기록물, 경찰 보고서, 의학 보고서 및 부검 결과, 망자가 죽기 전에 접촉했던 주변 사람들, 가족, 친구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죽음에 이른 방식이 불분명한 사례들의 사인을 밝혀내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고안했다. 동시에 이 심리적 부검은 어째서? 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다."
박사는 그녀에게 심리 부검을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고통을 찾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자살이란 심리적 고통입니다. 하지만 미리 경고를 드려야 하겠군요. 답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답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박사의 말이 내겐 아득하고 컴컴한 동굴처럼 느껴졌다. 자살은 누구에게나 생경한 슬픔이다. 앞이 아니라 뒤에서 뜻밖에 닥쳐오는 슬픔인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자살은 슬픔의 다섯 단계나 그 어떤 도식과 이론으로도 잘 설명되지 않는 종류의 슬픔이다. 슬픔은 곧장 다양한 감정들과 뒤섞인다. 수치심과 분노, 과거에 대한 불안은 물론이고 악성 죄책감 역시 빠지지 않는다. 과거로 끊임없이 되돌아가 잘못된 것을 수정하고 싶은 욕구는 생지옥처럼 무한 반복된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나면, 우리는 애초에 우리가 알고 있다고 확신했던 것에 대한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아는 것이 힘이란 말이 있지만, 알지 못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우리가 끝내 진실을 외면하는 건 그것을 알게 됐을 때의 고통을 피하기 위한 정신의 반항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면의 자아를 고찰하지 않는 태만에 대해, 시인 루실 클리프턴은 '루실 클리프턴에게 찾아온 빛'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적는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는 삶의 위험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진정성을 찾기 두려워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빛은 고집스럽게 계속된다."
아무리 눈을 질끈 감아도 빛은 끝내 살아남아 끝내 우리 생을 붙잡는다. 어떤 사람에겐 그것이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 찾아오기도 한다. 자살에 관한 무수한 자료와 동생의 일기를 읽으며 저자는 십 대의 자살자들 사이에는 완벽주의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비타협적인 태도가 십 대들에게 좌절감과 절망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동생은 자신이 한심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두려워했고, 나약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 늘 즐거운 표정을 연습했다. 하지만 저자는 가면 뒤에 숨어 있던 동생의 내면은 가혹한 자기 경멸로 가득 차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절망 속에서 질문한다. 어째서 어떤 사람에겐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어떤 사람에겐 죽을 만큼 힘들었던 걸까?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뜨거운 주전자를 우연히 만지면 생각도 하기 전에 우리 몸이 반응해서 바로 손을 떼잖아요? 내 동생은 내면의 고통이 너무 심해서 즉각적으로 자기를 보호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우리 몸은 무엇보다 살기를 원하죠. 당신 여동생이나 내 남동생은 어둠 속에 사느라 그런 본능적인 보호를 못 받았던 겁니다."
나는 '통증은 살아 있음의 증거'란 말을 여기저기 잘도 써대곤 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이 문장을 읽다가 마음이 무너졌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매주 만나 웃고, 떠들고, 책과 음반을 나누던 사람이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에 대한 실감이 내겐 도무지 없었다. 월요일 오후 7시 30분, 바쁘게 이동 중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멍했다. 멍해서, 믿기지 않아서, 빙판길에서 넘어졌다. 이튿날, 커다란 멍이 생긴 무릎과 골반을 바라보면서 저토록 시퍼런 멍은 어디에서 왔나 싶었다. 저 멍들은 어디로부터 흘러와 이처럼 슬픔을 전시하고 있나 싶었다.
심리 부검을 하던 저자는 동생의 자살에 아버지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녀가 박사에게 묻는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우리는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박사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모비딕을 들고 와 저자인 멜빌이 했던 말을 직접 읽어주었다. "우리 삶에는 후퇴 없는 한결같은 진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해진 단계를 따라 쭉쭉 나가기만 하지는 않는다… 모든 걸 다 겪고 나면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유아기와 소년기를 거쳐 어른이 되고 '만약에'를 영원히 되풀이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극한 이해는 종종 오해로 치닫는다. 우리의 사랑이 자주 증오로 오염되듯.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있다면, 그렇다면, 그건 우리가 그 사람을 끝내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푸른밤 종현입니다'에서 DJ와 게스트로 만났던 날, 그에게 앨범 한 장을 받았다. 앨범 위에는 "백 작가님. 건강하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마지막 '라디오 디톡스 백영옥입니다'에서 그를 만났던 날, 그는 내게 새 앨범 한 장을 내밀었다. 앨범 위에는 이런 글자가 적혀 있었다. "백 작가님. 건강하셔야만 해요!" '건강하세요'와 '건강하셔야만 해요' 사이, 생선 가시 같은 조사 몇 개가 몸에 박혔다. 여리지만 단단한 차이의 그 조사들 속에서 멀쩡한 얼굴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살면서 그토록 많이 참아봤는데, 울음 참는 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제 막 슬픔에 빠져든 사람들을 보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걱정 말아요,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지는 못 하겠지만 거기에 익숙해질 거예요." 그와 함께 한 모든 날이 좋았다. 밤의 자유로를 달려 새벽에 도착했던 스튜디오도, 그의 목소리도, 한없이 지쳐 있지만 힘내려는 명랑한 안간힘 역시 그랬다. '푸른밤'의 마지막 방송을 하던 날, 넘치게 흐르던 그의 눈물이 기억난다. 오래 슬플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너의 그림자를 읽다 - 질 비알로스키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