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규 조명감독이 자신이 설치한 조명 앞에 섰다. “40년 동안 일하면서 나를 위해 조명을 만진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싱글즈’ ‘웰컴 투 동막골’ 등 영화 10여편과 광고 3000여편에서 조명감독을 맡았다.

지난달 22일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선 팔씨름 소재 영화 '챔피언'을 촬영하고 있었다. 영화 스태프 60여명 중 김용완(37) 감독을 비롯해 대부분 20~30대였다. 40대는 2명, 50대는 없었다. 이만규(60) 조명감독은 유일한 60대였다. 올해로 40년째 영화와 CF에서 조명 일을 해왔다. 이날 이 감독은 촬영 내내 서 있었다.

―영화 찍을 때 항상 서 있나요?

"광고든 영화든 거의 그렇죠. 40년 동안 일할 때 앉아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네요."

―왜 그런가요?

"서 있어야 조명 상태가 어떤지 잘 보이니까요."

이 감독 코는 헐고 입술은 부르터 있었다. 일주일 내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영화 촬영이 계속돼서다. 어쩌다 쉬는 날에는 촬영지를 미리 답사하러 다닌다고 했다. 그래도 표정이 밝았다. 그는 "'퍼펙트게임(2011)' 이후 6년 만의 영화 촬영"이라면서 "광고보다 영화 찍을 때 더 재미있다"고 했다.

―이유가 뭔가요?

"광고는 상품이나 사람을 예쁘게만 찍으면 되잖아요. 영화는 장르에 따라 또 분위기에 맞춰서 느낌이 달라져야 하니까 조명이 마술을 부리는 순간이 많지요."

―조명이 어떻게 마술을 부리나요?

"(그는 작은 손전등을 꺼내더니 자기 얼굴을 이쪽저쪽에서 비춰보였다)아래에서 조명을 비추면 괴기 영화처럼 음산한 기운이 들죠? 사람마다 얼굴 좌우가 조금씩 다른데, 어디를 비추냐에 따라 멋있어지기도 하고 초라해지기도 합니다.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장면이라고 해도 여행 갈 때와 장례식장 갈 때, 차가 뻥뻥 뚫릴 때와 막힐 때 화면 느낌이 달라야 하겠죠? 조도가 같다고 해도 조명으로 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어요."

조명 제일 잘 받는 배우는 이영애

그는 2003년부터 싱글즈, 웰컴 투 동막골, 퍼펙트게임 등 영화 10여편에서 조명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그는 영화보다 CF 조명감독으로 더 유명하다. 지금까지 그가 참여한 TV 광고는 3000편이 넘는다고 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왔던 배우 이종원이 의자에 올랐다가 착지하는 리복 CF 조명을 그가 작업했다. 현대자동차 포니2부터 제네시스까지, 삼성 휴대폰 애니콜부터 갤럭시 S8까지 그의 조명을 받았다. 그는 특히 1980년대부터 2000년 초반까지 화장품 광고계에서 이름을 날렸다. "태평양(현 아모레퍼시픽)은 황신혜, 한국화장품 김희애, 쥬리아화장품은 전인화씨를 모델로 세웠을 때가 있어요. 그때 연출감독은 달랐지만 조명감독은 모두 저였지요. 이영애·심은하·고소영·전지현·옥소리·신주리·김지호씨도 화장품 광고로 만났어요."

―광고 모델이 더 예쁘게 보이도록 하는 마술을 부렸군요.

"모델마다 얼굴이 살아나는 빛의 각도와 세기가 미세하게 달라요. 이제는 조명을 비췄을 때 모델 컨디션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나이 50 넘어가고, 조명 일 30년 정도 했을 때부터 그렇게 보이더군요."

―제일 조명을 잘 받는 모델은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굳이 꼽으라면 이영애씨입니다. 얼굴 각이 조명받기 좋습니다."

―조명감독에게는 미의 기준이 조명받는 각이군요.

"사람뿐만 아니라 제품도 그래요. 조명감독 입장에선 사람보다 사물이 더 찍기 어렵습니다."

―왜 그렇죠?

"빛을 반사하기 때문이죠. 크기가 작고 금속면이 많은 시계 광고 찍기가 가장 까다로운데, 한 장면 찍으려고 조명 작업을 12시간 한 적도 있습니다. 밥솥 광고 찍을 때는 한 장면 때문에 30시간 넘게 조명을 만진 적도 있어요."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하지만 그렇게 작업할 때가 그립기도 하다"고 했다.

―뭐가 그립습니까.

"요즘은 컴퓨터그래픽(CG)을 믿고 현장에서 대충대충 할 때도 있거든요. 조금 더 조명을 꼼꼼하게 하려고 하면 '됐습니다. CG하면 되니까 그냥 갑시다' 이렇게 얘기하는 연출감독이나 촬영감독이 있어요. 아무리 세상이 발전해도 현장에서 잘 찍어야 후반 작업하기도 수월한데. 그래서 영화에 더 애착이 가는지 모르겠어요. 영화는 광고보다 현장에서 하는 조명 작업으로 결판날 때가 많으니까요."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나요?

"'웰컴 투 동막골(2005)'이요. 강원도 평창군 횡계리에서 찍었는데 한겨울 밤 촬영이 많았어요. 체감온도는 영하 40도까지 떨어지고, 눈이 1m 넘게 와서 발이 푹푹 빠지기도 했죠. 카메라와 라이트 거리가 약 200m 됐는데, 순간순간 조명을 손봐야 해서 많게는 하룻밤 30~40번 이 거리를 왕복하기도 했죠. 그때도 촬영 현장에서 제가 제일 연장자였습니다."

"내 조명이 최고라고 자부한다"

그가 조명을 처음 배운 곳도 영화판이었다. 경북 봉화군 재산면에서 태어난 그는 고교 졸업 직후부터 서울에서 영화 조명을 배웠다. "배우 이순재씨하고 김창숙씨가 나온 '집념(1977)'이 제가 참여한 첫 작품이었어요."

―원래 영화를 좋아했나요?

"전혀요. 저는 깡촌에서 태어났어요. 중학교 1학년 때인가 마을에 전기가 처음 들어왔죠. 영화관은커녕 TV도 없었어요."

―조명 일이 생소했겠군요.

"처음에는 라이트를 제대로 만지지도 못해요. 장비 나르고 닦고, 잡일만 했어요. 지금은 영화나 드라마 조명팀이 6~7명이지만, 예전에는 장비가 무거워서 8~9명 됐고 선후배 간 규율도 셌지요. 석 달에서 여섯 달 지방 촬영 나가면 막내인 제가 밤에 선배들 속옷하고 양말을 빨았어요. 한겨울에 선배 옷 빨아 연탄아궁이 앞에서 말리다가 깜빡 졸아서 옷 태우고 혼난 적도 있고요. 현장에서 선배 어깨너머로 배웠는데, 잘못하면 바로 구타가 따라 왔어요."

―일을 그만두고 싶진 않았나요?

"제 친구들은 회사원·공무원 돼서 집에 돈 부치는데, 저는 집에서 돈 타서 쓸 때가 많았어요. 한 5년 정도 고민했는데 다른 일은 해본 적이 없으니 그만둘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또 조명 일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재미가 붙었어요."

이 조명감독은 영화·드라마에서 조명 보조로 일하다 1980년대부터 주로 광고계에서 일하게 됐다. 경제 호황으로 각종 상품이 쏟아지고 TV 광고가 본격적으로 늘어나던 때였다. 그는 1988년 CF 조명감독이 됐다. 그는 "1980년대부터 10년 전까지 한 달에 28~29일 일했다"며 "9시 뉴스 직전 나오는 광고 10편 중 5~6개가 제가 조명감독을 맡은 광고일 때가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한 달에 며칠 작업하나요?

"영화 안 할 때는 한 달에 일주일 정도 광고 작업합니다. 제 실력을 알고 오래 거래했던 사람들이나 어려운 조명 작업을 해야 할 때 저를 찾지요."

―촬영 현장에서 뛰는 유일한 60대 조명감독이라고 들었습니다.

"광고는 저 혼자이고, 영화계에는 제 연배 조명감독이 2~3명 있습니다. 광고, 영화감독이 대부분 40대니까 저같이 나이 든 사람하고 일하는 게 아무래도 부담되겠죠. 미국이나 일본은 70대 촬영감독·조명감독도 활발하게 활동하는데 솔직히 부럽습니다."

―그래도 계속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나이 들었으니 대접받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다만 제 기술이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어요. 제 성격상 제가 현장에서 짐이 된다고 하면 당장 내일부터 일 안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영화나 CF·잡지책 보면서 이건 어디서 조명을 쐈을까, 무슨 표현을 주려고 이 각도에서 빛을 줬을까 연구합니다. 밖에 다닐 때도 쇼윈도나 인테리어 조명이 멋있으면 꼭 사진 찍어서 공부하고요. 해외에서 새 장비가 나오면 꼭 사서 테스트해보고 실전에서 써 보죠. 제가 일하면서 산 장비만 수십억원이 넘습니다."

디지털 시대 조명감독의 처세술

이 조명감독은 술을 안 마신다. "원래는 술을 좀 마셨는데 1980년대 한 달 내내 일하고 밤샘도 많이 해서 술을 마시면 몸이 버티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요즘에는 '술을 좀 마실걸' 후회가 되기도 한다"고 했다.

―왜 후회가 되나요?

"제 밑에서 조인트 맞고 욕 먹으면서 배워서 입봉한 제자들 30여명 때문에요. 저는 실력만 있으면 된다고 가르쳐 왔어요. '술 마시면서 비즈니스 안 해도 조명 기술만 최고이면 된다'고 했죠. 그런데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면서 이 바닥 일의 3분의 2는 이 사람이 하든 저 사람이 하든 별 차이가 없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까 술 사면서 다른 사람 비위 잘 맞추는 사람들이 일을 잘 따내죠. 제자 중에 잘 나가는 녀석도 있지만, 못 나가는 녀석도 있어요. 얘네들이 명절에 저한테 인사 오면 '너희도 광고주나 대행사한테 비즈니스 좀 해라'고 말하죠."

그는 촬영장에 설치돼 있는 조명 약 100개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이렇게 좋은 장비들이 있고, 앞으로 더 좋은 장비들이 나올 텐데 그만둬야 할 날이 온다고 생각하니 좀 서글퍼지네요." 촬영은 밤까지 계속됐다. 영화 주인공을 맡은 마동석이 촬영 장면을 모니터링하더니 "감독님, 오늘 제가 조명발 좀 받네요" 했다. 슬쩍 웃는 이 감독 얼굴에서 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