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고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는 ‘블랙아웃(Black Out)’, 이른바 '필름'이 끊어진 상태에서 저지른 범행은 심신미약 상태로 볼 수 없어 주취감형(酒醉減刑·술에 취해 저지른 범죄에 대해 형벌을 줄여주는 것) 대상이 아니라는 판결이 나왔다.
부산지법 형사6부(부장 김동현)는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주거침입 준강간)로 재판에 넘겨진 A(24) 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고 성폭력 치료강의 40시간 수강을 명령했다고 7일 밝혔다.
법원은 음주로 인한 블랙아웃 증상에 대해 ‘일시적인 기억 상실증’일 뿐,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결정능력이 미약한 ‘심신상실’ 상태로 보기 힘들어 감형사유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형법상 준강간죄에서 말하는 ‘심신상실’은 상대방이 음주 등으로 완전히 의식을 잃지는 않았더라도 만취 등 사유로 자신의 성적 행위에 대해 정상적인 대응능력과 판단능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주취감형의 법적 근거는 형법 10조 2항이다. 해당 조항은 “심신장애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경우에는 형을 감경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앞서 A 씨는 지난 7월 6일 오전 7시쯤 부산의 한 모텔에서 술에 취해 자고 있던 B(여·37)씨의 방에 침입해 옷을 벗기고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A 씨는 자신이 투숙 중인 방에서 나와 복도를 약 15m 걸어가 잠기지 않은 상태였던 B씨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이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 성폭행을 당한 B 씨가 놀라 모텔방 불을 켜자 A 씨는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A 씨는 “범행 당시 만취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술로 인한 심신장애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재판부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모텔 내부 폐쇄회로(CC) TV에 찍힌 A 씨의 거동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성폭행 과정에서 피해자와 정상적인 대화를 나눈 점, 만취 상태로 보이지 않았다는 모텔 업주의 진술 등을 종합해볼 때 A 씨가 심신장애 상태에 있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재판부는 이어 “범행 당시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A 씨 주장은 일시적 기억상실증인 ‘블랙아웃’ 증상에 불과하다”며 “블랙아웃은 알코올이 임시 기억 장소인 해마세포의 활동을 저하할 뿐, 뇌의 다른 부분은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해 심신장애 상태로 보기 힘들다”고 했다.
다만 재판부는 “A씨가 벌금형을 초과한 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