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째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같이 들고 다니는 연주자가 있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비올리스트인 이유라(32). 두 악기를 모두 들고 서울에 온 그녀는 22일 LG아트센터에서 독주회를 연다. 주제는 '판타지'. 1부는 슈만 '환상곡'과 힌데미트가 1919년 작곡한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로 꾸미고, 2부는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의 '솔로 바이올린을 위한 환상곡'과 쇤베르크의 '바이올린을 위한 환상곡' 등으로 채운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는 품 안에 울림통을 끼고 왼손과 활을 오밀조밀 놀려 다채로운 소리를 빚어낸다는 점에서 같다. 하지만 1㎜만 오차가 생겨도 소리와 질감이 확 달라지는 악기 세계에서 바이올린보다 1.5배 더 크고 음높이는 5도 낮은 비올라를 제대로 연주하려면 왼손 운지법과 오른손 활 놀림을 전혀 다르게 해야 한다. 두 악기에 모두 능숙한 연주자는 옛 소련이 낳은 바이올린의 전설 다비트 오이스트라흐와 1967년 레번트릿 콩쿠르에서 바이올린 여제(女帝) 정경화와 공동 우승한 핀커스 주커만 등 손에 꼽을 정도.

20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이유라가 왼손에는 비올라, 오른손에는 바이올린을 쥐고 깔깔 웃었다. 바이올린은 4년 전 경매에서 건진 1800년대산(産) 갈리아노, 비올라는 2002년 만들어진 콕스다. 그녀는“아침에 눈 뜨면 바이올린도 비올라도 아닌, 피아니스트 리히터가 치는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를 듣는 게 버릇”이라며“악보 속 쉼표마저 군더더기 없이 그려내는 리히터의 연주를 닮고 싶다”고 했다.

이유라 역시 '드문 손'이다. '바이올린 신동'으로 불렸고, 2013년에는 세계적 권위의 독일 ARD 콩쿠르에서 비올라 부문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력은 화려했다. 아홉 살에 뉴욕 줄리아드 음악원의 예비 학교에 진학, 열한 살에 세계적 대가 대부분이 소속된 매니지먼트 회사 ICM과 계약, 열여섯에 뉴욕 카네기홀 데뷔. 승승장구는 20대에도 멈추지 않았다. 2007년 미국에서 활동하는 젊은 연주자에게 주는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의 수상자가 됐다. 화려하고 당찬 소리, 어떤 무대에서든 강력한 힘을 내뿜으며 설득력을 부여하는 활 놀림에 정경화는 그녀를 콕 집어 기대감을 나타냈다.

예정대로라면 지난해 이맘때 독주회를 열었을 테지만, 공연을 한 달 앞두고 집 근처 포틀랜드 뒷산에 오르다 발목이 부러져 취소했다. 20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마주 앉은 그녀는 "두 차례 수술받으면서 한 달을 꼬박 쉬었다. 다치기 전까진 '언제 한번 쉬어보나' 했는데, 막상 쉬니 몸이 근질근질해 혼났다"며 웃었다.

"열다섯 살 때 말보로 페스티벌에 갔다가 '재미 삼아 해볼래?' 하는 제안에 덜컥 비올라를 쥐었어요. 연주자와 악기도 궁합이 있어서 품에 안으면 서로 잘 맞는지 3초 안에 느낌이 딱 와요." 당시 축제에서 코다이의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세레나데'를 선보였던 이유라는 비올라와 처음 만난 때가 "이상형과 하는 데이트처럼 설�다"고 했다.

"바이올린은 배운 대로 하면 얼추 소리가 나는데, 비올라는 좋은 소리를 내려면 열과 성을 다해도 모자라요. 악기를 다루는 근육과 기교, 개념이 달라서죠." 이유라는 "비올라는 잘해도 있는 줄 모르고, 못하면 너무 듣기 싫어서 바이올린보다 열 배 더 어렵다. 비올라를 하면서 겸손해졌다. 날카롭던 내 바이올린도 어른스러워지고 깊어졌다"고 했다.

이유라는 예술이 인간의 장점뿐만 아니라 약점까지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열다섯 사춘기 때, 불안하고 격동적인 엘 그레코 그림, 자신의 상처를 조각으로 구현한 루이스 부르주아 작품을 보면서 예술이 인간의 좋은 부분만이 아니라 못나고 모자란 부분까지 가감 없이 보여줄 수 있어야 카타르시스를 준다는 걸 깨달았어요. 책이든 영화든 해피엔딩은 별로예요. 상처의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자기도 모르는 내면을 음악으로 내보이는 게, 음악가인 제가 이 세상에서 해내야 할 몫이라 생각해요."

이유라 바이올린&비올라 리사이틀 '판타지'=22일 오후 8시 LG아트센터, (02)3443-94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