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란(Lutheran)'. 요즘 '루터란 처치(Lutheran Church)'는 루터교(한국의 경우 '기독교 한국 루터교')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그러나 시작은 비아냥이었다. '루터를 따르는 놈들'이란 뜻으로 종교개혁 당시 반대편인 가톨릭 신자들이 붙인 말이다. '믿음만으로, 은총만으로, 성서만으로!'라는 루터의 깃발 아래 모였던 루터란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7400만명이 속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독일 그리고 북유럽으로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치켜든 이후 불길은 북쪽으로 번졌다. 종교개혁 과정에서 루터가 이동한 거리가 2만㎞가 넘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서서히 스며든 불길은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북쪽 국가로 옮겨 붙었다. 전쟁도 벌어졌지만 루터교는 급진적인 다른 개신교 교파와는 달랐다. 오히려 점진적이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성례전'.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가 성례전을 부활절·성탄절 등 특별한 기념일에 하는 것과 달리, 루터교는 주일 예배 때마다 성례전을 거행한다. 예배 형식으로 보면 루터교는 천주교·성공회와 닮았다. 루터가 처음부터 혁명이나 개혁이 아닌 토론을 바랐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루터교와 천주교는 원수?
루터교에 대한 중요한 오해는 지난 500년 동안 가톨릭과 원수처럼 지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다. 실제로 천주교와 루터교는 거의 450년 가까이 교류가 없었다. 이때는 실제로 원수처럼 지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루터교와 천주교가 화해를 시작한 것은 이미 반세기 전이다. 루터교와 교황청은 1960년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무렵 대화를 시작한 이래 지난 1999년 핵심 교리 차이였던 '의화(義化) 교리'에 대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감리교와도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 발표 장소는 2006년 서울 금란교회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지난해 10월 스웨덴을 방문해 축하한 바 있다.
◇한국 선교 반세기
한국과 루터교의 첫 만남은 18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교사 카를 귀츨라프(1803~1851)가 서해안에 들러 1개월간 한자로 된 전도서를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귀츨라프 선교사의 방문을 본격적 선교로 보긴 어렵다.
본격적인 선교는 6·25 전쟁 이후인 1958년. 미국 루터교 교단이 파송한 바틀링(Bartling), 도로(Dorrow), 보스(Voss) 등 3명의 선교사가 입국하면서 선교가 시작됐다. 선교사들은 미디어를 활용한 선교에 힘을 쏟았다. 1959년 방송 선교 라디오 프로그램 '루터란 아워(Lutheran Hour)'를 시작했다. 이어 1960년 '기독교 통신 강좌'를 열었고, 교양잡지 '새생명'도 펴내고 있다. 교육 사업은 1966년 설립한 '루터신학원'이 모태다. 초기엔 연세대 신과대와 연합신학대학원에 위탁해 목회자를 양성하던 루터교는 1984년 경기 용인 신갈에 터를 마련해 루터신학교를 개교했으며 1997년엔 루터신학대학교로 명칭을 바꿨다. 현재 국내에는 전국에 50여개 교회가 있다.
루터교는 다른 나라의 도움으로 한국에 정착한 것을 본보기 삼아 해외 선교에도 나서고 있다. 베트남 다낭에 이레교회를 설립한 것을 비롯해 필리핀과 일본이 태풍과 쓰나미 피해를 당하였을 때에도 성금과 구호물품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