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두 명의 신사는 영국을 대표하는 예술가이자, 스승과 제자 사이다. 마이클 크레이그―마틴(Craig-Martin)은 '영국 개념미술의 선구자'로 불린다. 줄리언 오피(Opie)는 '앤디 워홀 이후 최고의 팝아티스트'로 손꼽힌다. 닮은 듯 다른 두 작가의 전시가 한국에서 동시 개막했다. 영국 현대미술의 진수를 감상할 기회다.

개념미술 아버지 크레이그-마틴

갤러리현대서 개인전 'All in All' "오직 12가지 색으로 사물 표현"

1973년, 유리 선반에 물컵을 올려 놓고 작가는 "이것은 참나무"라고 했다. 사람들은 "물"이라고 반박했지만 "작품을 만드는 건 작가의 의도"라고 맞섰다. '참나무'는 마르셀 뒤샹의 변기 작품 '샘(Fontaine, 1917)' 이후 또 하나의 문제작이 됐다.

마이클 크레이그─마틴은“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강렬하면서도 단순한 색을 사용한다”며 “마젠타(magenta·심홍색)는 나를 대표하는 색깔”이라며 웃었다.

영국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이클 크레이그―마틴(76)이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 11월 5일까지 개인전 'All in All'을 연다. 5년 만의 한국 전시로 30여 점 신작이 나왔다. 그는 90년대부터 전구, 안경, 우산, 와인따개 등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사물을 소재 삼아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탐색해 왔다. "더는 쪼갤 수 없을 만큼" 형태를 단순화시킨 사물에 낯선 색을 입혀 뜻밖의 시각 경험을 선사한다. 노란색 바탕에 하늘색 전구, 분홍색 바탕에 빨간색 스마트폰을 그려넣는 식이다. 전작(前作)엔 카세트테이프, 지구본 등이 주를 이뤘지만, 신작엔 노트북, USB 키 같은 IT 제품들이 등장한다. "요즘 아이들은 카세트테이프를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죠. 10년 후엔 마우스가 뭔지 모르는 사람도 생길 겁니다. 현재 존재하는 걸 그리는 나는 사물의 역사를 작품으로 기록하는 셈이죠."

마틴은 오직 12가지 색만 사용한다. 주황색 노트북, 분홍색 배구공처럼 사물 본래의 색 대신 밝고 강렬한 색상을 입힌다. "예술은 익숙한 걸 낯설게 보는 것"이라는 그는 "그림에 숨겨놓은 상징이나 이야기 따위는 없다. 내 작품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아쇠! 각자의 스토리를 만들라"며 웃었다.

크레이그―마틴은 젊은 영국 예술가를 칭하는 'yBa(young British artists)'를 길러낸 주역이다.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줄리언 오피, 데이미언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등을 가르쳤다. 그는 "나와 제자들은 미술 카테고리에 국한되지 않는 작가들"이라며 "각자 하고 싶은 걸 하며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공통점"이라고 했다. 허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가 됐지만, 마틴은 "줄리언 오피가 훨씬 중요한 작가"라고 했다. "오피야말로 자기만의 독창적 스타일로 미술 시장에 뛰어들어 성공함으로써 후배들에게 희망을 준 모델이었죠." 노장은 "지금이 나의 최고 전성기"라며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작업을 그만둘 것"이라고 했다. 주요 작품이 뉴욕현대미술관(MoMA), 테이트, 퐁피두센터 등에 소장돼 있다. 세계 현대미술에 공을 세운 업적으로 2001년 대영제국훈장(CBE)을 받았다. (02)2287-3500


앤디워홀 잇는 팝아티스트 오피

수원시립미술관 내년 1월까지 "깃발·물결 보면 창작욕망 솟아"

흑색 테두리와 몇 가지 색(色)·면(面)만으로 강렬한 미니멀 아트를 구현해온 줄리언 오피(59)는 스승 크레이그―마틴과 닮았다. 다만 마틴이 사물에 천착한다면 오피는 사람, 그중에서도 '움직이는' 사람에 집중한다. 내년 1월 21일까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열리는 '줄리안 오피' 전시는 트레이드 마크인 '걷는 사람들(walking people)' 연작을 비롯해 3D프린팅으로 제작한 인물 초상, LCE와 LED로 구현한 자연 풍경 등 구작과 신작을 아우르는 80여점을 내걸었다.

대형 태피스트리(직물)로 제작한‘걷는 사람들’앞에 줄리언 오피가 섰다. 그는“인간의 걷는 행위는 가장 자연스럽고도 익숙하며 파워풀한 이미지”라고 했다.

'칠하는' 전통 회화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회화(Moving Painting)로 본격 진입한 오피의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기회. 특히 2층 전시실을 가득 채운 LED 신작(新作)들은 탄성을 자아낸다. 평면 회화로 보이는 푸른 초원에 수십 마리 흰 양이 꼬물거리는가 하면, 어둠 내린 홍콩항(港) 앞바다는 네온사인이 만든 무지갯빛 잔물결이 일렁인다.

작가는 거리의 미세한 움직임들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했다. "쇼핑몰을 걷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무용수처럼 느껴질 때, 바다 위를 나는 새들과 그 순간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감동을 이룰 때 창작욕이 솟구쳐요. 펄럭이는 깃발, 넘실대는 물결이 제겐 매우 중요해요. 예술이란 마법의 기교! '움직임'이라는 사소한 디테일이 관객을 행복하게 하죠." 조각, 태피스트리, 타일모자이크, LED로 무한 확장되는 재료에 대해서는 "아이들 장난치듯 다양한 실험을 하고 싶다"며 웃었다.

전시장이 화성행궁과 이웃한 것도 오피에겐 특별한 영감을 줬다. 미술관 외벽에 LCD로 제작한 '걷는 사람들'은 궁궐 광장을 가로지르는 시민들을 표현한 것이다. 정조대왕 능행차 행렬도 구경한 오피는 한국 전통연에 흥미를 보였다. "연에 달린 꼬리가 바람에 팔랑이는 모습! 다음 작품에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지요(웃음)."

형태를 극도로 단순화한 작품이 공공장소 사인물 같다고 하자 "예술이 특별하고 고귀하다는 편견은 현대에 와서 생긴 것"이라고 했다. "원시로부터 예술은 주변과 소통하는 도구,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이었죠. 미술관에 걸려야 예술인가요?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 벽면에 비치는 내 작품은 예술이 아닐까요?"

크레이그―마틴에 대해서는 "예술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시켜준 사람. 어린 학생들이 자신만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권한을 준 스승이었다"고 했다. "한 개를 만들지 말고 열 개를 만들라고 충고했죠. 그래야 '큰 그림'을 이해할 수 있다며!" (031)228-3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