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헬싱키는 이미 깊은 가을. 9월 초인데 벌써 겨울맞이가 시작됐다. 해가 짧아질수록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다. 이곳 사람들이 집 꾸미기, 그러니까 디자인에 공들이는 이유다. 집집이 따뜻한 분위기를 더하려 전등을 갈고, 문양 독특한 두꺼운 카펫을 펼친다. 바야흐로, 인테리어의 계절이 펼쳐지는 것이다.
◇독립 100주년, 더 주목받는 '메이드 인 핀란드'
헬싱키 중앙역에서 24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간다. 야트막한 언덕 위, 살구색 2층 집이 우르호 케코넨 전 핀란드 대통령(1956~1982년 재임)이 살던 집 탐미니에미(Tamminiemi). 안으로 들어선다. 온 집 안 가구와 침구, 식기가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게 모두 '메이드 인 핀란드'다. 쏙 들어앉아 책 읽기 좋은 동그란 볼 체어(ball chair)는 에로 아르니오 작품이고, 부드럽지만 골격이 단단한 가죽 소파는 위르요 쿠카푸로 디자인이다. 두 사람 모두 핀란드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이다.
케코넨 대통령 부부는 탐미니에미에서 30년을 살았다.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두 사람은 핀란드 디자인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애썼다. 수많은 외국 정상을 '메이드 인 핀란드'로 가득한 탐미니에미에서 맞았다. 휴가를 떠날 땐 핀란드 운동화 카르후를 신었다. 미국과 캐나다, 아시아 등지에서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전시회'를 열었다. 이탈라 그릇과 아르텍 가구, 마리메코(Marimekko) 패브릭 등이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발판이 됐다.
올해는 핀란드가 러시아에서 독립한 지 100주년 되는 해. '국산품을 애용합시다' 표어가 나붙은 것도 아닌데, 핀란드 사람들은 핀란드 디자인을 애용한다. 길을 걷다 보니 마리메코 글씨가 큼직하게 새겨진 천가방을 든 사람이 5분에 한 번씩 보인다. 이케아보다 대여섯 배는 비싼 이탈라 그릇이나 아르텍 의자를 하나씩 사모으고, 가위는 주황색 손잡이 달린 피스카스만 쓴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스톡만 백화점에 갔더니, 독립 100주년 기념 특별 디자인이 많이 나와 있다. 그릇 브랜드 아라비아는 과거에 인기가 많았던 머그컵 시리즈 10개를 재생산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1914년 디자인 컵을 하나 집어 들었다. 한정판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괜히 탐이 났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멋
핀란드 현지 친구 하나는 핀란드 디자인의 가장 큰 매력을 '타임리스(timeless)'라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멋이 살아나는 것이라고. 건축가 겸 디자이너 알바르 알토(Alvar Aalto·1898~1976)의 '스툴 60'을 예로 들어줬다. 1933년에 디자인된 다리 3개짜리 의자다. 더 이상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단순한 디자인이다. 이 스툴은 80년 넘도록 조금도 모양이 바뀌지 않은 채, 전 세계적으로 1억개 이상 팔려나갔다.
알토는 도서관이며 요양원, 지방 의회, 교회, 음악당 핀란디아홀까지 여러 공공 건축물을 지었다.
한국으로 치면 경기도 분당쯤 되는 에스포(Espoo)에 있는 알토 대학 주요 건물도 알토가 설계했다. 붉은 벽돌 건물은 수직으로 솟는 대신 수평으로 뻗어나간다. 평평한 땅에 끝도 없이 펼쳐지는 핀란드의 숲과 닮았다. 커다란 창이 빛을 빨아들여 구석구석까지 비춘다.
헬싱키 시내에서는 뜻밖의 강렬한 색을 마주하게 된다. 2호선까지밖에 없는 주홍색 지하철이다. 차체 바깥뿐 아니라 내부 좌석도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선로를 미끄러져 들어오는 선명한 오렌지빛에 눈이 번쩍 뜨였다. 헬싱키 지하철은 1980년대 초 가구 디자이너 안티 누르메스니에미와 보석 디자이너 칼레바 코루가 공동 디자인했다. 짙은 회색 도시 헬싱키와 대비되는 색을 일부러 골랐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마리메코에서 1960년대부터 꾸준히 팔린 스테디셀러 역시 양귀비꽃을 모델로 한 핫핑크 꽃무늬 '우니코'다. 여름철 핀란드 숲에서 볼 수 있는 베리나 버섯, 야생화를 굵직하게 그려넣은 패브릭 제품도 종종 보인다. 핀란드 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카이 프랑크(Kaj Franck·1911~1989)는 "색은 내가 유일하게 사용하는 장식적 요소"라고 했다.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간 뒤, 헬싱키 남쪽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다. 소나무 널빤지 4000개를 망토처럼 펼쳐 놓은 모양의 목조 사우나 '로울루'가 보인다. 시간이 지나면 나무 널빤지는 바닷바람과 눈비를 맞아 회색으로 바뀌고, 결국 해안선의 바위처럼 보일 것이다.
항공편:핀에어가 인천~헬싱키를 매일 왕복한다.
식당: 괜찮은 식당에서 한 끼를 먹으려면 점심은 1인당 20~30유로. 저녁은 40~100유로까지 생각해야 한다. '레스토랑 쿠쿠(kuukuu)'는 청어 절임, 순록 고기 등 핀란드 로컬 음식으로 25유로에 점심 코스를 낸다.
여행정보: ―사우나를 빼놓고 핀란드를 논할 수는 없다. 최근 문을 연 '로울루'(loylyhelsinki.fi)나 '알라스'(allasseapool.fi)가 유명하다.
―탐미니에미(1970년대 핀란드 디자인 가구로 채워진 빌라) 수~일요일 오전 11시~오후 5시. 오후 3시에는 영어 가이드를 들을 수 있다. 성인 9유로.
―디스트릭트 우덴만 거리를 중심으로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와 스튜디오가 자리 잡고 있다. 전통적 직조 방법을 활용한 패브릭 브랜드 '요한나 굴릭센', 화려한 색감과 자연이 조화된 의상으로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이바나 헬싱키' 등 요즘 뜨는 핀란드 디자인을 만날 수 있다.
―이탈라&아라비아 디자인 센터 스토어(트램 6T번 종점에 있는 아웃렛) 빨간 딱지가 붙은 제품은 곧 단종되는 상품으로 할인율이 제일 높다.
―알토대학 헬싱키 캄피 터미널에서 102번 버스를 타고 알바르 알토 공원에서 하차하면 도서관 앞. 교내 학생식당에서는 8유로 안팎으로 푸짐한 식사를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