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키워드로 보는 이야기

이재명 의사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그것은 고향이 이북이기도 하지만, 이른 나이인 24세로 순국했기 때문이다. 의사에 대한 판결문에 의하면, 그는 1887년 10월 16일 평안북도 평양군 평양성 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후 의사는 평양의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한 뒤, 1904년 미국 노동 이민회사의 모집에 응하여 하와이로 갔다. 1906년 3월에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미국 본토로 옮겨갔다. 그가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을 때, "어려서 하와이에 건너가서 공부하다, 조국이 섬 왜놈에게 강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고 한 말이 전해진다.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 소식이 알려지자,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내세우며 안창호를 중심으로 창립되었던 공립협회*가 미국에서도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미국 본토로 건너온 의사는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항일 민족운동에 동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사가 공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던 시기인 1907년 6월, 헤이그특사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의 퇴위를 강요했다. 한국 침략의 최대 걸림돌로 인식하던 고종을 퇴위시킨 일본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했고,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이렇게 되자 공립협회는 공동회를 개최해 매국적 숙청을 결의하고 그 실행자를 선발했다.

을사늑약 체결 직후 한일수뇌진의 기념사진

이때 실행자로 지원한 사람이 바로 이재명 의사였다. 의사는 그 해 10월 9일 일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중국과 노령(러시아 일대)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 공립협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이 조직한 항일 독립운동단체.
안창호, 이대위, 박선겸, 김성무 등이 처음 조직할 때는 상호친목을 목적으로 1903년,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라고 하였으나, 점차 샌프란시스코의 한국인 이민자 수가 늘고 본국 내의 일본침략이 심해지자 1905년 조직을 확대 개편하여 단체목적을 항일 독립운동으로 하여 이름을 공립협회로 바꿨다.

*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1907년 일본이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기 위해 강요한 조약이다. 정미년에 맺은, 7개 항목으로 구성된 조약이라는 뜻에서 '정미7조약'이라고도 부른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가체제에 마지막 숨통을 죄기 위해 법령제정권·관리임명권·행정권 및 일본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조약안을 제시, 아무런 장애도 없이 1907년 7월 24일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명의로 체결·조인했다.

이재명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을 추진하기도 했다. 1909년 1월 순종의 평안도 순행 때 이토가 동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이토의 처단을 위해 평양역에서 동지 몇 사람과 함께 대기했다. 하지만 이 거사는 실행되지 못했다. 이토가 신변의 위험을 느껴 순종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어, 안창호가 순종의 안전을 위해 만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 처단에 대한 신념이 강했던 의사는 다시 한번 동지 김병록과 함께 서울과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기회를 엿보다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귀국했다.

이재명 의사(왼쪽)와 이완용

이후 그는 을사5적*을 비롯한 매국노 처단을 추진했다. 1909년 11월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한일합방'('경술국치'를 일본의 해석으로 말한 것)을 주창하는 성명서를 공포하면서 이른바 '합방운동'에 착수하자, 매국노 처단을 늦출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의사는 1909년 11월 하순 평양 경흥학교 안에 있는 서적종람소와 야학당에서 여러 동지들과 몇 차례 실행 방법을 논의했다. 매국노 이완용과 친일단체 일진회의 이용구를 처단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같은 해 12월 7일에는 최종적으로 동지들 간의 역할 분담을 확정했다.

이후,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그해 12월 22일 오전 종현 천주교당(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12월 22일 오전 11시, 이재명 의사는 성당 문밖에서 군밤 장수로 변장해 기다리고 있다가 이완용을 공격했다.

의사는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지나갈 때 비수를 들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를 제지하려는 차부(車夫) 박원문을 찌르고,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의사의 공격에 이완용이 도망하려 하자 다시 어깨 등 3곳을 더 찔렀다.

거사 직후, 의사는 "나는 모든 동포를 구하기 위하여 이 거사를 했다. 그런데 그대들은 어찌 방관만 하느냐"고 호기롭게 말했다. 또 "오늘 우리의 공적(公敵)을 죽였으니 정말 기쁘고 통쾌하다"고 외치며 만세를 연창한 후, 곁에 있는 사람에게 담배를 청해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유유히 피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완용이 중상에도 살아남으면서 매국노 처단은 실패로 돌아갔다.)

* 을사5적
을사늑약에 찬성해 서명한 다섯 명의 대신들을 가리킨다.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다.
(왼쪽) 의사가 1909 이완용 암살을 시도했던 종현 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 (오른쪽)현재의 명동성당

[한국 첫 흉부외과기록 발견…환자는 이완용]

[[박종인의 땅의 歷史] 흰 소나무는 보았다, 주인 잃은 집터와 나라를]

[이완용을 개 취급했던, 영원한 장군 노백린(盧伯麟) ]

일본 순사가 의사를 이완용의 관저로 데리고 갔을 때, 매국노 조중응이 의사를 보고 "네가 흉행을 한 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재명 의사는 눈을 치켜뜨고 "너 조중응은 귀중한 인사를 이 모양으로 하대하느냐"며 곁에 있는 순사를 보고 "더러운 냄새가 코를 찌르니 권연초 한 개를 가져오라"고 하여 유유히 피워 물었다.

붙잡혀서도 그는 당당했다. 경시청에서 일본인 순사가 선생에게 "공범이 있느냐?"고 묻자, 선생은 "이러한 큰일을 하는데 무슨 놈의 공범이 필요하냐. 그런 필요 없는 문제는 묻지도 말라. 공범이 있다면 2천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다"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법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재판정에서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협조하고 도와준 자를 말하라"는 일본인 판사의 물음에, 의사는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자는 우리 2천만 동포 모두며 방조자는 전혀 없었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그리고 내외의 방청인들이 운집한 가운데에서 태연하고도 엄숙한 어조로 역적 이완용의 8개 죄목을 꾸짖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이완용의 처단을 시도하였음을 역설했다.

결국, 이재명 의사는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최후 진술을 통해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만,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스러운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한다 할 것이니, 한 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한 한을 기어이 설욕 신장하리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후 이른바 '한일합방 조약'의 강제 체결로 10월 1일 조선총독부 체제의 강제 발족을 코앞에 둔 1910년 9월 30일, 의사는 사형 집행으로 순국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1910년 10월 26일자 <신한민보>의 이재명 선생 별세 보도기사. "리의사 귀천"이라는 제목으로, 사형이 집행되어 별세한 선생을 애도하고 있다.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92] 이재명, 이완용을 응징하다]

이재명, 목숨을 바친 애국(愛國)

이재명, 후대의 이야기

이재명 의사 의거 터

서울 명동의 명동성당 앞에는 의사의 의거 터가 있다. 표석에는 "이재명(1890-1910)은 친일 매국노인 이완용을 척살하려 한 독립 운동가이다. 평북 선천 출생으로, 1909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찔렀으나, 복부와 어깨에 중상만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순국하였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위치: 서울 명동역 8번출구 명동성당 앞

이재명 의사 동상

2001년에 진안 이씨 후손들이 전북 진안군 군하리에 의사의 의거를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 (사)이재명의사추모사업회가 관리하고 있다.

- 위치:
전북 진안군 진안읍 군하리 356

■ 참고
국가보훈처

[뜨거운 그 이름, 안중근]

[이완용을 개 취급했던, 영원한 장군 노백린(盧伯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