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창곡은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이다. 노래방에서 누군가가 "한 곡 뽑아 봐!" 하며 등을 떠밀면, 말로는 "아우, 저 노래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하면서도 마이크를 손에 꼬옥 쥐고서 '칵테일 사랑'을 2절까지 부른다. 1절만 부르고 적당히 끊는 게 노래방의 법도인 줄은 알지만, 신명나는 멜로디가 나로 하여금 노래를 멈출 수 없게 한다. 그런데 사실 이 노래의 가사는 멜로디와 정반대로 우중충하기 짝이 없다. 애인 없는 사람이 갖은 궁상을 다 떨면서 연애하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내용이다. 아무래도 나는 이 노래를 너무 많이 불렀지 싶다. 말이 씨가 되어 노래 가사 그대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칵테일 사랑' 가사처럼 마음이 울적했던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전시회장에 갔다. 한가로운 평일 낮이었기에 당연히 인적이 드물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여기도 커플, 저기도 커플, 미술관 곳곳에 커플이 바글바글했다. 그들의 행동거지는 참으로 요란했다. 열에 아홉은 그림 보는 대신 그림을 배경 삼아 자기들만의 화보를 찍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팔짱을 꼈다가, 어깨동무를 했다가, 허리를 감싸 안았다가, 얼씨구, 이제는 뽀뽀까지! 요리조리 포즈를 바꿔가며 사진 찍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미술관에 왔으면 조용히 그림이나 감상할 것이지 왜 저러고들 난리 블루스를 추는 것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의 자유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다른 관람객에게 폐를 끼치지는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액자마다 들러붙어서 그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도저히 그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그림 보기를 포기하고 전시회장 구석에 앉아 그들의 행태를 관찰했다. '염병 떠는 연인들'전(展)을 보러 왔다고 생각하니 이것 또한 색다른 감상 포인트였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방금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는 그들의 눈은 초롱초롱 빛났고 입가에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마치 진귀한 작품을 마주해 황홀경에 빠진 사람들 같았다. 하기야 미술관에 걸린 뜻 모르는 수백 점의 그림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 있겠는가. 사랑에 빠진 연인의 눈에는 둘만의 사연이 담긴 사진 한 장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일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작품이었던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뭐해, 지금은 아무도 봐주지 않는 인기 없는 그림인걸. 괜스레 쓸쓸한 마음이 들어 전시회장을 터벅터벅 빠져나왔다.
이런 날에는 역시 술이지. 헛헛한 가슴을 안고 포장마차에 갔다. "이모! 소주 하나, 맥주 하나, 꽁치구이 하나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꽁치구이를 기다리며 맥주에 소주를 말다가 돌연 소름이 돋았다. '소맥'도 칵테일이잖아! 나는 '칵테일 사랑'의 저주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이제라도 다른 노래를 불러야겠다. 연애 사업에 긍정적인 쪽으로 말이다. 어떤 노래가 좋을까? 구름 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긴 나의 귓가에 음악 한 곡이 스쳤다. "잇츠 레이닝 멘! 할렐루야, 잇츠 레이닝 멘! 아멘!" 옳지, 바로 이거야! 부르고 또 부르다 보면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날이 오겠지. 오늘부터 내 십팔번은 'It's Raining Men'이다. 노래방 가면 2절까지 부를 거니까 마이크 뺏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