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시장의 진정한 강자는 럭셔리가 아니다. 럭셔리 브랜드의 제품을 국내 생산하는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업체야말로 패션 산업을 이끄는 ‘소리 없는 강자’들이다. 이들은 점점 더 단순한 하청 업체가 아닌, 높은 기술을 보유한 ODM(제조업자 개발생산)으로 세계 패션 시장에서 영향력을 높이고 있다. OEM과 ODM의 파트너사를 넘어 자체 브랜드로 발돋움하는 OBM까지, 국내 의류 제조업의 현주소를 알아본다. [편집자주]

제조업 한계 느낀 OEM 기업들, 브랜드 M&A에 나서
삼성물산 등 대기업 브랜드 철수하고 빠진 자리, 제조업체가 채운다
납품 가격 1,000원짜리 셔츠... 상표 달면 2~3만 원대에 판매할 수 있어
꼼빠니아, 트루젠 등 패션 브랜드 인수한 글로벌세아가 대표적

시몬느가 독자 브랜드로 론칭한 0914

‘얼굴 없는 기업’으로 조용한 성장을 이어오던 주요 OEM∙ODM 업체들이 자체 브랜드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들은 중견 패션 업체를 인수 합병하거나 신규 브랜드를 론칭하는 방식으로 브랜드 유통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기존에 브랜드 유통을 전개하는 패션기업들이 외형을 줄이거나 사업을 접는 것과 대조적이다. 브랜드 없이도 승승장구하던 제조 업체들이 자체 브랜드 사업 확장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무엇일까?

◆ 공격적인 M&A로 자체 브랜드 확보… 브랜드는 미래 성장동력

글로벌세아(전 세아상역)는 관계사 에스앤에이를 통해 내년 봄 골프웨어 브랜드 톨비스트(TORBIST)를 론칭할 예정이다. 이 회사는 지난 2006년 나산(현 인디에프)를 인수해 내수 패션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인디에프는 여성복 조이너스, 꼼빠니아, 남성복 트루젠, 캐주얼 테이트, 편집숍 바인드 등 다방면의 패션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한세실업도 공격적인 M&A로 자체 브랜드를 확보했다. 2015년 캐주얼 브랜드 FRJ를 인수한 데 이어 지난해 TBJ, 버커루, LPGA 등을 보유한 패션업체 엠케이트렌드(현 한세엠케이)를 인수해 다양한 브랜드 라인업을 구축했다. 2011년에는 유아동 브랜드 컬리수를 보유한 드림스코(현 한세드림)를 인수하고, 2014년 유아패션·출산용품 브랜드 모이몰른을 론칭했다.

한세실업의 지난해 전체 매출은 1조777억 원으로, 이 가운데 브랜드 사업 매출액은 5000억 원에 달한다. 이 회사는 장기적으로 글로벌 유통망을 갖춘 해외 유명 패션 브랜드를 추가로 인수해 글로벌 종합 패션기업으로 도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세실업의 자회사 한세엠케이의 스트리트 캐주얼 브랜드 NBA

이처럼 OEM 업체들이 자체 브랜드 확보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수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서다. 100% 수출에 의존한 OEM 사업은 수출국의 시장 변동에 취약한 단점이 있다. 실제로 최근 1~2년 사이 국내 OEM 업계는 최대 수출국인 미국 현지 주문량이 줄면서 성장세가 둔해졌다.

자사 공장과 ODM 노하우를 활용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려는 측면도 있다. 기존의 OEM∙ ODM 방식에서 납품가 1000원짜리의 티셔츠를, 브랜드 사업에서는 2~3만 원대에 팔 수 있다.

한 OEM 업체 관계자는 “자체 브랜드는 OEM 사업의 단점을 극복하고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대안”이라며 “오랜 기간 유명 브랜드에 제품을 납품하며 생산 노하우를 확보한 만큼, 자신의 기술을 담은 브랜드를 만들어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목적도 있다”라고 말했다.

◆ 1000원 짜리 티셔츠를 3만 원에… 브랜드 사업은 고부가가치 사업

국내 패션 시장은 지속된 불황과 소비 위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주요 대기업들은 브랜드를 접거나, 처분하는 방식으로 패션사업을 축소하고 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실적 부진으로 엠비오, 라베노바 등을 철수했으며, 국내 패션업계 5위였던 SK네트웍스는 패션 사업부를 현대백화점 그룹에 매각했다.

이처럼 내수 시장이 불안한 상황에서 OEM 기업들이 브랜드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도리어 위험 요소를 키우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글로벌세아의 경우 2011년 자회사 인디에프를 통해 캐주얼 브랜드 메이폴을 인수해 SPA 브랜드로 키운다는 청사진을 그렸지만, 2년도 안 돼 사업을 철수한 바 있다.

영원무역이 자체 브래드로 론칭한 타키, 이베이코리아와 협업해 유통 부분을 강화했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OEM 업체들의 브랜드 사업 의지는 더 강해지고 있다. 업체들은 브랜드야말로 미래 성장동력이라 입을 모은다.

한세실업 관계자는 “독자 브랜드는 장기 불황과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비책”이라며 “2011년 인수한 한세드림의 경우 2013년 매출이 466억 원에 불과했지만, 작년엔 1400억 원의 매출을 올려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시몬느는 코치, 마이클코어스, 마크제이콥스 등 명품 핸드백을 만들어온 30년 ODM 노하우를 담아 2015년 자체 브랜드 ‘0914’를 론칭했다. 트렌드에 민감한 ‘잇백’이 아닌 독창성을 중시한 디자인으로, 길게 내다보고 브랜드를 키울 방침이다.

노스페이스 등 아웃도어 의류를 제조하는 영원무역은 라이프스타일 아웃도어 브랜드 타키를 이달 공식 론칭했다. '여행'이란 콘텐츠를 접목한 브랜드로, 지난해 이베이코리아와 손잡고 온라인 마켓 테스트를 거쳤다. 이 브랜드는 온라인 직영 매장을 중심으로 모든 제품을 물류에서 직배송하는 '재고 없는 매장' 전략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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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통상이 2012년 론칭한 SPA 브랜드 탑텐

갭, 랄프로렌 등의 해외 사업 수주를 맡은 신성통상은 토종 SPA 브랜드 탑텐으로 SPA 시장을 공략했다. 니트 제조에 강점을 지닌 만큼, 티셔츠와 스웨트셔츠 등으로 상품을 특화해 가격경쟁력을 높였다. 아웃도어 브랜드에 다운을 공급해 온 태평양물산은 2009년 프리미엄 침구 브랜드 소프라움을 론칭해 라이프스타일 사업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이불 속 다운 충전재는 의류보다 고급스러운 품질이 요구되기 때문에, 더 부가가치가 높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