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같은 수법의 백화점 털이가 범행 도중 붙잡혔다. 1960년 11월 21일 새벽 대전 중앙백화점에 3명의 절도단이 하수도를 이용해 침입, 최고급 비단을 싹쓸이해 들고 나오다가 검거됐다. 떼도둑은 공권력이 가장 취약한 새벽 3시를 'H―아워'로 잡았지만 물건을 가지고 나오는 순간, 제복의 사내가 그들을 덮쳤다. 격투 끝에 이들을 체포한 사람은 경찰이 아니었다. 그 시절 밤마다 거리를 순찰하던 야경원(夜警員)이었다. 시민들이 '야경꾼'으로 더 많이 부른 이들은 1982년까지 이어진 야간 통금 시대의 밤을 지킨 파수병이었다.

딱딱이 들고 2인 1조로 밤거리를 순찰하는 야경원 사진과 함께 이들의 고충을 심층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 "범인들에게 얻어맞는 건 흔하고 도둑쫓다 강물에 빠져 익사한 일도 있다"고 했다(1963년 9월 20일자).

야경꾼은 일제강점기에도 있었지만 연중무휴로 순찰하게 된 건 1961년 4월부터다. 1950~1960년대에 경찰력이 대간첩 작전 등에도 동원되면서 민생 치안이 소홀해지자 야경원이 늘어났다. 1964년의 경우, 매일 밤 통금을 단속하던 전국 경찰관이 약 1만3000명이었는데 야경꾼은 그 10배인 13만342명이나 됐다.

야경꾼의 첫째 장비는 나무로 만든 '딱딱이'였다. 두 짝을 '딱, 딱, 딱' 두드리며 돌았다. 딱딱이가 밤거리 수호자라는 이미지가 얼마나 강했던지, 1960년엔 통금 시간에 귀가하지 못한 두 청년이 남의 집 문패 두 개를 떼어 딱딱 소리 내며 야경꾼 행세를 하다가 경찰에 붙들린 일도 있다(동아일보 1960년 5월 11일자).

딱딱이 소리란 나쁜 짓 하려고 골목에 숨어 있던 자들에게 겁을 줘 도망가게 만들려는 경고음이었다. 그러나 치안 당국은 1963년 여름 "앞으론 딱딱이를 치지 말라"고 지시했다. "나 여기 있다"고 광고하며 다니면 도둑을 어떻게 잡느냐는 것이었다. 그럴싸한 말이긴 했으나 딱딱이 소리가 사라지자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매일 밤 그 소리 들으며 잠을 청했던 상당수 주민은 "요샌 도대체 야경을 도는 거냐, 안 도는 거냐"라고 따졌다. 야경비를 걷으러 온 징수원에게 "돈 못 내겠다"는 항의도 잇따랐다. 결국 1965년 11월부터 야경꾼들은 딱딱이를 다시 치게 됐다. 쥐죽은 듯 고요해진 거리에 울려 퍼지는 딱딱이 소리는 많은 시민 마음을 가라앉혀 발 뻗고 잠들게 했다.

하지만 야경꾼의 시대에 범죄는 오히려 늘었다. 1962년 서울서 발생한 도범은 3만2141건이었는데 1964년엔 4만2244건으로 급증했다. 하루 평균 120집이 털린 셈이다. 경찰은 소극적이었다. "도둑맞았다고 신고하면 경찰은 이웃집 식모가 밥 짓다가 바가지 깬 정도로밖에 취급하지 않는다"는 언론의 비판이 나왔다.

야경꾼 제도의 부작용도 늘어갔다. 상당수는 도둑에게 얻어맞고 흉기에 찔려가면서도 열심히 임무를 수행했지만, 일부 미꾸라지가 물을 흐렸다. 통금 위반자를 폭행하거나 근무시간에 도박을 하고, 심지어 야경꾼이 도둑질을 하다 붙잡히기도 했다(조선일보 1965년 12월 26일자). 결국 딱딱이 소리는 1960년대 말부터 서서히 사라져 갔다.

이제 그 딱딱딱 나무 부딪는 소리는 추억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딱딱이처럼 밤길 범죄자들에게 경고하는 소리가 다시 들리고 있다. 과천시가 지난달부터 인적 드문 골목길 등 221곳에 스피커 달린 CCTV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심야에 방범 홍보 음악을 틀고 있다고 한다. 범죄자들 심리를 위축시키려는 목적이라니 '디지털 야경꾼'인 셈이다. 행정기관이 뭔가 하고 있다는 걸 소리로 알리는 효과가 있다는 점까지도 옛 딱딱이를 닮았다. 도둑을 제압할 완력이 없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디지털 야경꾼이 엉뚱한 짓 할 걱정은 없으니 발전이라고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