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어둠은 늘 그렇게/ 벌써 깔려 있어' ―한영애 '누구 없소' 중
도입구로만 따지면 이 노래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백미(白眉)다. 발칙하고 도발적이다. 쳇바퀴처럼 헛도는 세상에 되바라지게 대들듯 노래는 '여보세요'와 '거기 누구 없소'라는 강력한 어퍼컷 두 방을 날리며 시작한다. 그것도 점성 높은 한영애의 목소리를 통해서다. 일탈적이고 전복적 태도가 '록 스피릿'이라면 이 노래는 시작부터 그 정신을 깨운다. 한밤중에 온 세상을 호출하고 사람을 찾는 이 호연함이라니. 흐뭇하고 통쾌하다.
노래는 '디오게네스의 등불' 대신 록의 서치라이트를 켜고 대낮이 아닌 깊은 밤 깨어 있는 사람을 찾는다. 그러므로 '누군가 깨었다면/ 내게 대답해줘'라는 1절 마지막 가사는 세상의 자기 기만적 허구를 질타하는 것이자 내 안에 잠든 타성을 깨우는 자기 반성적 다짐이기도 하다.
'어둠은 늘 그렇게 깔려'있고 세계는 안전하다. 관습적 질서는 잠처럼 아늑하다. 그 세계에 투항한 삶들은 '오늘 밤도 편안히들 주무시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그 바깥을 배회하는 삶은 쉽게 잠들 수 없다. 삼선 슬리퍼에 추리닝 바지를 입었을 법한 그 자발적 루저가 하는 일은 '창문을 두드리는 달빛에 대답하듯/ 검어진 골목길에' 소리나 치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한번'이다. 여기 '그냥'이라는 부사의 심드렁함과 무목적성이 노래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세상은 '그냥' 그런 것이라는, 결코 대답을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부조리에 대한 냉소가 깔려 있다.
노래는 또 이어진다. '유혹의 저녁 빛에 물든 내 모습'을 지우고 청신한 새벽이 '나를 깨우치려' 왔다. 저녁에서 새벽으로 이어지는 이 짧은 시간은, 통념과 관습의 틈새에서 본래의 나를 묻고 찾는 정신적 여정이다. 슬픈 쳇바퀴처럼 아침은 언제나 오겠지만, 깨어 있는 새 아침은 더디 올 것이다. 그 지루한 기다림에 지쳐 '아침이 정말 올까 하는 생각에/ 이제는 자려' 한다. 이 능청까지 사랑스럽지 않은가. 그리고 노래는 역설적 엔딩으로 향한다. '잠을 자는 나를 깨워줄 이/ 거기 누구 없소'. 타성의 잠에 빠진 세상을 향해, 되레 나를 깨워 달라고 부탁하는 이 기민한 언어적 도치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해의 여름은 이 노래로 인해 뜨거웠다. 노래가 실린 한영애 2집 음반은 한국 블루스 록 여왕의 등극을 알린 음악적 대관식이었다 '건널 수 없는 강'이 실렸던 1집에서 블루스 보컬의 정서적이면서 장르적 특질을 탁월하게 보여준 한영애가 이 앨범을 통해 완벽하게 자신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어둡고 끈적이면서도 퇴폐적인 이 야생의 목소리는 이전 한국 여성 보컬의 계보에서 찾아볼 수 없던, 오로지 한영애만의 것이었다. 마성 넘치는 그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이 노래는 결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노래를 작사·작곡한 윤명운은 세상이 그의 비범함을 알아주지 못한 비운의 뮤지션이다. 걸출한 블루스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였던 그는 몇 장의 앨범을 냈지만 모두 사장되는 불행을 겪었다. 이정선의 표현에 따르면 '래그타임(ragtime) 연주론 한국 최고'였던 그였다. 소수 장르인 블루스에 천착해 그것을 한국화한 이 뛰어난 음악가를 이제라도 기억해야 한다.
'누구 없소'는 제3회 한국노랫말대상에서 '밝은 노랫말상'을 받았다. 이 노랫말을 두고 '밝다'고 평한 저 세간의 감수성이 좀 우습고 씁쓸하다. 윤명운이 만들고 한영애가 완성한 이 '죽여주는' 노래 때문에 한국 록은 조금 더 영토가 넓어졌다. 이 지리멸렬한 세상에 노래처럼 부탁하고 싶다. '누군가 깨었다면/ 나 좀 일으켜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