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시를 향하는 전철. 다마코는 번잡한 도쿄를 떠나 후지산 옆 고향 마을 고후에서 잉여 생활을 택한다. 감독은 백수 생활을 하는 다마코와 이를 묵묵히 지켜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에너지가 바닥난 청춘에게 필요한 것은 조용한 기다림이라고 말한다. 사계절이 흘러도 다마코는 직장을 구하거나 독립을 하지 않는다. 한 번도 하지 않던 집안일을 돕는 것으로 자기 속도대로 성장할 뿐이다.

도쿄에서 그렇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 전철로 한 시간 반 걸리는 고향 고후에 도착한 23세 다마코는 도쿄에서 가져온 커다란 가방을 방에 내려놓은 후 먹고 자고 만화 보는 일 이외에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가을이 지나 겨울, 봄, 여름까지.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는 네 계절을 나는 동안 은둔형 외톨이 비슷하게 지낸 그녀와 아빠 이야기다.

집 안에는 이혼하고 혼자 사는 아빠와 다마코뿐이다. 아빠가 차린 밥상 앞에 딸이 멍하게 앉아 있는 장면이 이 영화 주요 배경이다. 은둔형 외톨이가 오래전부터 사회문제로 부각된 일본에선 다마코 같은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등교 거부로 시작된 청소년기 아이들 경우부터 멀쩡히 직장 다니던 사람들의 집 안 은둔기까지 사례는 참 다양하다. 청년 취업률이 곤두박칠치면서 한국의 경우에도 경제적·심리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은둔형 외톨이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영화에서 가장 유별나고 도드라진 인물은 주인공 다마코가 아니다. 연구 대상은 아빠다. 직접 만든 스파게티 위에 식당에서나 볼 법한 파슬리까지 장식해 딸에게 내놓는 아빠 말이다.

아빠는 스포츠점을 운영한다. 그는 딱히 불만 없이 혼자 산다.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큰엄마가 아빠에게 선물 가게 주인을 소개해주기 전까지, 아빠는 (적어도 딸에게는) 묵묵히 집 안 청소를 하고 밥상을 차려주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아빠가 만든 양배추롤과 샐러드, 꽁치구이 따위를 우적우적 먹으며 다마코는 멍한 얼굴로 뉴스를 보다가 "역시 (일본은) 안 되겠어!" 같은 말을 내뱉는 게 전부다. 평소 부녀의 대화는 "네 방 청소해도 되냐?" 정도의 말일 뿐인 것이다. 물론 답답해진 아빠가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라고 딱 한 번 화를 낸 적이 있지만 "할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란 항변을 들은 후, 별말 없이 시간이 흐른다.

에어컨을 틀어놓고 춥다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만화를 보는 딸에게, 취업해야 하니까 옷을 사달라는 딸에게, 원서에 넣을 사진을 찍고 와서도 입도 뻥끗하지 않는 딸에게, 그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지금의 저는 제가 아닙니다. 살아가는 이상, 모두 누군가를 연기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인 척할 때가 가장 편안합니다. 그런 저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세요" 같은 다마코의 자기 소개서를 보고서도 말이다.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의 인내심을 가진 아빠가 아닌가! 영화 속에선 심지어 엄마나 분가한 언니는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영화에서 다마코를 적극적으로 집 밖으로 밀어낸 것 역시 아빠가 재혼할지도 모른다는 다마코의 불안 때문이었다. 한껏 불안해진 다마코가 아빠의 데이트 상대를 염탐하기 위해 일부러 그녀가 하는 선물 가게에 들어간 것이다.

모라토리움은 채무자의 법적인 지불 이행 유예를 말한다. 중지와 지연. 이 말을 청춘에 대입하면 자연스레 '갭 이어(gap year)' 같은 말을 떠올릴 수 있다. 본격적으로 대학 입학이나 취업을 하기 전, 자신의 진로를 모색해보는 시간이다. 일종의 안식년 같은 이 시간에 청춘들은 해외 봉사를 가거나 이곳저곳을 떠돌며 여행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 삶에 대한 다양한 자극을 받는다.

중요한 건 입학을 유예하거나 취업을 지연시키는 이 기간이 성장을 위해 필요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한국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선 정착돼 있는 시간이다. 어쩌면 이 시간의 있고 없음이 그들과 우리의 차이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이토록 취업이 어려운 시절에 퇴사가 꿈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건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퇴사 학교가 여럿 생기고 그곳의 커리큘럼 중 '여행기 쓰는 법'이라든가 '여행 스케치 하는 법' 같은 강좌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씁쓸해지는 기분이랄까. 너무 늦지 않게, 아니 조금 더 이른 시기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적극적으로 알 수 있는 시기가 주어졌다면 '퇴사를 꿈으로 간직한 사람'들의 숫자는 조금쯤 줄어들지 않았을까.

지금의 '대2병'이란 것도 성적과 점수에 맞춰 대학에 입학하고 난 이후 생기는 반작용 혹은 부작용일 것이다. 사회의 인정이나 부모님의 욕구를 내 욕망으로 착각하면서 벌어지는 혼란스러운 내면 풍경 말이다. 명문대 학생들이 특히 '대2병'에 취약하다는 건 시사하는 점이 크다. 대학이란 공간에서 나날이 떨어지는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선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내가 무엇을 했을 때 행복하며 불행한 사람인지 아는 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청춘의 모라토리움기를 거쳐야 하는 게 아닐까? 이 영화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이 참 많이 들었다.

"여름이 되면 나가라. 취직이 안 되어도 나가!"

밥을 먹다가 무심히 내뱉은 아빠의 말을 듣다가 다마코는 충격을 받는다. 아빠는 아무 말 없다가 강펀치를 날리는 복서였다. 말해야 할 때와 말하지 않아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의 담담한 박력은 가히 파괴적이다. 그녀 역시 때가 왔다는 걸 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걸 말이다. 고향에서 유일하게 친구가 된 동네 중학생과 그녀가 나누는 대화를 보면서 나는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자친구는?" "헤어졌어." "왜?"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잘. 자연 소멸이랄까." "뭐 원래 그런 거야."

녹아서 떨어지는 아이스크림을 쭉쭉 빨며 '자연 소멸'이란 말을 내뱉던 다마코의 얼굴을 보다가, 나는 그녀의 모라토리움기 역시 자연 소멸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모든 게 싫고 귀찮고 그저 나 자신만 미워질 때가 있다. 쭈그러진 풍선처럼 자존감이 바닥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말이다. 그럴 땐 풍선 안에 넣을 바람이 필요하다. 엄마 자궁처럼 피신해 쉴 곳이 필요하다. 나는 그곳을 종종 '안전지대'라고 부른다. 다마코의 안전지대는 아빠의 집. 그곳에서 다마코는 자신을 추스르고 드디어 세상으로 나가볼 생각을 품는다. 우리에겐 한 시절, 나를 되돌아보며 멍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부모에겐 자식의 멍한 시절을 견뎌줄 인내의 시간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도쿄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 타고 있을 다마코의 모습을 떠올렸다. 곧 본격적인 여름이 오겠지만 머리카락 위로 조금쯤 시원한 바람이 불기를 바랐다.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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