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터넷 서점의 서평집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제목은 '끝내주는 책' 장르소설 애호가인 작가, 번역자, 편집자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에 대해 짧은 에세이를 한 편씩 쓰게 한 것이다. 뒤늦게 고백하자면, 그거 쓸 때 꽤나 기합이 걸렸더랬다. 취향에서 글 솜씨까지, 다른 필자들과 바로 비교가 될 테니. '내가 놀림감이 되는 건 괜찮지만, 내 인생의 소설이 무시당하는 건 참을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임했다.
나중에 결과물을 보니 다른 저자들 역시 나와 같은 심정이었음이 훤히 보여서 웃음이 났다. 행간에 애정과 자존심, 자부심이 뚝뚝 묻어났다.
이 프로젝트의 규모와 수준을 확 넓히고 높여서, 지금 활동 중인 세계적인 추리소설가 100여 명에게 그들의 '인생 작품'에 대해 한 편씩 글을 써달라고 하면 어떨까? 성사되기만 한다면 정말 굉장한 물건이 나올 것 같지 않은가?
존 코널리와 디클런 버크가 엮은 '죽이는 책'이 바로 그 물건이다. 제프리 디버, 리 차일드, 요 네스뵈, 엘모어 레너드, 데니스 루헤인 등 그야말로 쟁쟁한 올스타 멤버 119명이 참여했다. 대가들이 차례로 연단에 올라 땀을 뻘뻘 흘리며, "여기 이 소설로 말씀드릴 거 같으면…… 몇 쪽만 읽어도 세상 근심 걱정 싹 다 사라져버려! 내 말 믿고 한번 펼쳐봐!"라고 외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이런 구경거리를 놓쳐서야 되겠는가. 당신이 '읽고 쓰는 공동체'의 일원이고, 특히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말이다.
게다가 특급 작가들의 독서 에세이다. 문학이란 무엇이고 장르란 무엇인가, 여성 작가들의 이름은 어떻게 지워졌나, 나는 왜 소설가가 되었나, 작가와 작품은 분리해야 하는가와 같은 근사한 질문과 답변이 가득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죽이는 책'이 소개하는 걸작 중 국내에 번역된 작품은 절반 남짓에 그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내게는 그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서평을 읽는 일은 그만의 묘미가 있다. 뭔가 보르헤스 소설 속에 들어온 기분도 들고.
옮긴이는 격월간 '미스테리아'의 김용언 편집장('끝내주는 책' 저자 중 한 사람이다)인데, 원고에 나오는 대상 작품의 과거 번역을 확인하려고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절판된 구간들을 사 모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출판사의 번역 청탁을 고사했다는 그는 "개인적인 욕심을 못 이기고 받아들였는데, 작업하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 웃는다. 엄청 길고, 각 나라 고유명사가 무진장이고, 여러 문장가의 문체를 다 살려야 하니, '번역자를 죽이는 책'이기도 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