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편하다. 터치 몇 번으로 멀리 있는 친구의 소식을 접하고, 뉴스도 보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장도 보는 세상이다. 이제는 터치마저 하지 않아도 내 목소리로 지시하면 인공지능(AI) 비서가 모두 실행해준다고 하니 이보다 편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휴대폰을 잃어버려 본 사람은 안다. 굳이 '디지털 중독'이라는 거창한 말을 쓰지 않아도, 내가 얼마나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깨닫는 순간 내 자신은 초라해진다. 나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듯한 공허함도 느낀다.
그럴 때마다 떠오른다. 한 글자씩 정성스레 써내려간 손편지, 귀한 사진 한 장, 초조하게 집 전화기 앞에 앉아 벨이 울리길 기다리던 그 시간, 약속 날짜를 정해 놓고 애 닳던 그 순간이.
편리함을 안겨준 디지털로부터 가끔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아날로그'를 다시 돌아보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태블릿·전자책에 익숙해진 우리지만 아직도 종이의 감촉을 잊지 못한다. 디지털은 터치만 하면 바로 읽을거리가 제공되어 좋지만, 아날로그는 한 장씩 '느릿느릿' 책장을 넘기는 그 느낌이 좋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자책(E-BOOK) 시장이 커지는 추세지만, 우리보다 먼저 전자책이 보급된 해외 출판시장에서는 '전자책의 감소'를 이야기하고 있다.
2008년 온라인 쇼핑사이트 아마존이 출시한 전자책 단말기 '킨들' 등장 이후 빠른 속도로 성장해온 전자책 시장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에서는 2014년 전자책 열풍이 정점을 찍은 이후 하락세다.
전자책은 전자단말기뿐 아니라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를 통해 종이책이 줄 수 없던 많은 기능을 제공한다. 책 여러 권을 무겁게 들고 다닐 필요 없이, 한 개의 단말기면 충분하다.
이런 장점에도 사람들이 전자책보다 종이책을 집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소 다양한 전자기기에 노출돼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데다가, 새로운 전자기기에 대한 흥미 또한 사라져 대부분의 독자가 페이지를 넘기는 종이책에 다시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보고 있다.
[英, 전자책 매출 17% 추락… 종이책은 8% 늘어 5년來 최고]
손으로 쓰기보다는 컴퓨터 키보드가 익숙한 세대라서, '악필'인 사람들이 늘었다. 인쇄기로 출력한 글씨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지금, 그래서 손으로 직접 쓰는 것에 대한 열망이 되살아났는지도 모른다.
소설가 김훈은 에세이 '라면을 끓이며'에서 "연필로 글을 쓰면 어깨가 아프고, 빼고 지우고 다시 끼워 맞추는 일이 힘들다. 그러나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살아 있는 육체성의 느낌이 나에게는 소중하다. 나는 이 느낌 없이는 한 줄도 쓰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손으로 직접 쓰는 기회가 줄어들어서일까. '손글씨'는 어눌하지만 직접 썼다는 '마음'이 담긴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각종 손글씨 대회가 이어지고, 개성 있는 글자체를 의미하는 캘리그래피(Calligraphy) 열풍도 꾸준하다.
드라마나 영화 제목은 물론 광고 문구, 상호, 제품명 등을 손 글씨로 작업하는 것이 대세다. 관련 서적도 불티나게 팔리고, 직접 손글씨를 배우러 다니는 사람들도 늘었다.
올해 초 끝난 tvN 드라마 '도깨비'에서 필사 시집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가 등장한 이후 필사책 열풍도 계속되고 있다. 그냥 눈으로 읽기만 하는 것보다, 손으로 한 글자씩 쓰면서 뇌를 깨우고 심리적 안정도 찾는다.
[축의금 봉투 쓸 때마다 부끄러운 내손… "악필 벗어날래" 필사 열풍]
직접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만년필과 연필 등 필기구 판매도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만년필은 고급화 전략을 통해 '손글씨의 맛'을 찾는 사람들을 겨냥하는 데 성공했다. 만년필의 주 고객층은 40대에서 20~30대로 확장되는 추세다.
만년필의 경우 중저가 제품으로 입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쓰고 싶은 욕구와 디지털의 편리성을 결합해 만년필 브랜드 몽블랑은 특유의 필기감을 즐기면서 필기 내용을 디지털로 저장해 활용할 수 있는 제품도 내놨다.
인공지능 시대, 전통 도구 연필의 복권(復權)도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에 국내 첫 프리미엄 연필 가게가 들어서고, 유명 연필 블로거, 연필로 쓴 잡지, 연필로만 그린 애니메이션이 등장하는가 하면, 진짜 연필 같은 전자 연필까지 출시됐다. 인터넷몰 옥션·지마켓 연필 판매량도 3년 연속 증가 추세다. ▶ 기사 더보기
13년 전에 사라졌던 LP 공장이 최근 다시 문을 열었다. 옛 음악에 대한 향수와 아날로그 LP판에 대한 그리움이 만들어낸 결과다. 해마다 열리는 LP판매 행사장이나 LP 매장에는 사람들이 꾸준히 몰려든다.
1980년대 콤팩트디스크(CD), 1990년대 MP3의 등장 이후 멸종 위기에 내몰렸던 LP 음반이 되살아나고 있다. 전세계에서 LP를 다시 찾기 시작한 건 2000년대 후반부터다. 국제음반산업협회(IFPI)에 따르면, 세계 LP 음반 판매량은 2008년 500만장에서 2015년 3200만장으로 6배 이상 규모로 성장했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올해 음반과 턴테이블, 카트리지(레코드 음반을 듣는 '바늘') 등 LP 관련 시장 규모가 10억달러(약 1조1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국내에서도 2016년 LP 판매량은 28만장, 매출액은 98억원 규모로 추정된다. LP판이 인기를 얻으면서 조용필을 비롯한 김광석, 양희은, 이소라, 김동률 등의 음반이 LP로 제작됐고, 최근에는 지드래곤·아이유·인피니트 등 유명 아이돌 가수들도 LP로 제작한 음반 판매에 나섰다.
[아날로그 음반의 부활… "아이돌 'LP'도 곧 나올 것"]
고성능·고화질의 카메라 경쟁 속에 흑백으로 기념 사진을 남기고, 직접 '세상에서 단 한 장뿐인' 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잇따라 문을 닫았던 필름 사진관, 그중에서도 흑백 전문 사진관이 아날로그 향수를 타고 서울, 경기도, 부산, 대구 등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옛 감성이 남아있는 동네에 주로 생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20대 연인이나 30대 예비부부가 기념사진을 찍으러, 자녀의 돌이나 백일에 특별한 순간을 남기려 사진관 문을 두드린다. 흔한 셀카 대신, 흑백 카메라로 스스로를 촬영하는 '자화상'도 인기다. 사진사의 도움 없이 혼자서 5분이고 1시간이고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며 자신을 찍어야 한다. 가수 아이유, 배우 강석우 등의 사진이 입구에 걸린 물나무사진관은 최근 고객의 자화상만 모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 기사 더보기
필름과 흑백 사진, 사진 한 장에 대한 관심도 증가 추세다. G마켓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한 달 동안 카메라 판매량에서 DSLR(-7%), 똑딱이카메라(-8%), 미러리스카메라(-12%) 같은 디지털카메라 판매량은 감소한 데 반해 즉석카메라는 2%, 일회용 카메라는 55%로 필름카메라 판매량은 증가했다.
아날로그 취향에 맞춘 제품 출시도 이어지고 있다. 라이카는 즉석카메라 '라이카 소포트'를 출시했다. 자동 모드를 비롯해 파티·피플 모드, 스포츠·액션 모드, 마크로 모드 등 다양한 촬영 모드를 지원하고 다중 촬영, 장노출, 초점 거리 기능을 갖췄다. '셀카족'의 편리한 셀프 촬영을 위해 전방에 직사각형 거울을 단 것도 특징이다. 후지필름도 지난 10월 즉석 사진기를 위한 흑백 필름 '인스탁스 미니 필름 모노크롬'(1팩 1만4000원)을 출시했다. 한국 후지필름 관계자는 "컬러가 흔한 시대에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랑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 기사 더보기
터치 한 번이면 되는 편리한 시대에 '아날로그로의 회귀'는 어쩌면 수고로움을 자처한 모습이다. 종이책을 펼쳐보고, 연필로 쓰고 지우고, 엘피판에 바늘을 올리는 일 등은 현재로서는 매우 불편한 일임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번거로움을 이겨내고 찾게 되는 것, 다 먹지 않고 아껴뒀다가 하나씩 까먹는 사탕 같은 존재. 이것이 아날로그의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