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 우울증'이라는 신조어를 봤다. 카페인 우울증 때문에 스마트폰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는 기사였다. 우울증 앞에 붙은 '카페인'은 카카오 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약자였다. SNS를 오래 하면 우울해진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야근이 이어지는 밤 친구들의 여행 사진을 봤을 때, 누군가의 승진, 취업 소식이 이어질 때, 애써 올린 사진에 '좋아요'가 생각처럼 붙지 않았을 때 느꼈던 '낙담의 추억' 역시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경험이다. 사실 SNS는 단순히 우울증만을 유발하지 않는다. 2년 전 읽은 '페이스북 심리학'이라는 책에서 나는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그날 저녁 샘은 페이스북에 들어갔다가 리사가 자신의 '가족 및 결혼·연애 상태'를 '약혼'에서 '연애 중'으로 바꾸었음을 발견했다. 더욱 놀랍게도 '~와 연애 중'이라는 표시 옆에 더 이상 샘의 사진이 없었다. 대신 샘과 가장 친한 친구의 사진이 있었다. 샘은 즉시 리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리사가 샘의 가장 친한 친구와 지난 3개월 동안 사귀었으며 두 사람 모두 이제 그에게 알려야 할 때가 왔다고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별을 '암 선고'처럼 통보받았던 이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이것은 신종 이별법인가! '페이스북 심리학'은 SNS가 우리의 삶과 내면을 어떻게 새롭게 디자인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고백하자면 이 책에서 내가 더 큰 충격을 받았던 건 끔찍한 사고 현장 사진이라는 희귀 아이템을 잽싸게 자신의 계정에 올린 남자가 자신의 사진 뒤에 붙인 해시태그였다. '맙소사, 이모와 이모부가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떴어!'
과거 우리는 여행을 가면 주로 풍경을 찍었다. 하지만 SNS가 제2의 정체성이 된 지금 세계 그 모든 풍경 안에 '내 얼굴'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2013년 말 영국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셀피(Selfie)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하지만 세계적인 셀피 유행은 비극의 도미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멕시코에선 권총이 장전된 줄 모르고 셀피를 찍다 스스로를 쏴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2014년 8월,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행 중이던 폴란드 부부가 셀피 촬영 중 추락했다. 이사벨라 프라키올라라는 이탈리아 소녀는 해안 절벽에서 셀피를 찍다 18m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 SNS는 여행의 의미마저 조금씩 바꾸고 있다. 과거 여행은 집 밖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일이었다. 낯선 공간으로 떠난다는 건 무엇보다 그곳에 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뜻밖의 경험을 하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친구를 만나지 않는다. 대신 SNS로 익숙한 친구들과 끊임없이 대화한다. 더 이상 예측 불가능한 곳으로 떠나지도 않는다. 검색이 가능한 곳이라면 우리를 구원할 현지 정보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구글맵'을 장착하는 한 길을 잃고 헤매는 일도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상 우리는 이제 내 일상을 통째로 짊어진 채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났다고 해서 황급한 업무를 알리는 보스의 SNS 메시지를 거부할 자유가 이제 우리에겐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SNS는 그 모든 측면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조율하고 새롭게 설계한다.
"자아 정체성은 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내내 분투하면서 자아 개념이나 자아 정체성을 조정한다. 부모로부터 독립하면서 독립성과 자아 정체감을 확립하려 애쓰거나 인생 경험을 통해 자신이 인간으로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간다. 소셜미디어라는 새롭고 영속적인 지형 속에서 '디지털 네이티브'들은 자아 정체성을 형성해가고 있고, 엑스 세대나 베이비붐 세대 같은 이전 세대들은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이 지형에 투영하고 있다. 자기 편집, 인정 추구, 현실과 다른 누군가로 자신을 재창조하는 행위는 자아 정체성을 왜곡할 수 있고, 두 가지 상충되는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하면 불안해질 수 있다."
많은 사람이 SNS를 자신의 일기장 같다고 생각한다. 사적인 공간이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SNS란 책상의 깊숙한 서랍처럼 내 비밀을 보장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SNS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수록 우울해지는 건 그곳이 사적인 공간이 아닌, 일종의 전시 공간이기 때문이다. SNS는 솔직한 자신을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SNS는 '실제의 나'가 아니라 '되고 싶은 나'를 보여주는 곳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SNS를 하면 할수록 더 우울하고 외로워지는 이유다. 실제의 나와 되고 싶은 나. 그것은 사진 필터와 포토샵으로 수정된 반짝이는 프로필 사진과 실제 내 얼굴의 차이만큼 크다. 이 차이가 깊을수록 우리 삶의 균열은 조금씩 더 깊어진다. 많은 심리학자와 과학자가이 삶의 행복을 위해 멀리해야 할 첫 번째 것으로 스마트폰을 꼽는 건 그런 이유다.
일례로 트위터의 창시자 '잭 도시' 같은 IT 기업의 수장들은 주말이면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명상이나 하이킹을 나간다. 이들이야말로 24시간 연결성이 일으키는 폐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이 설계한 세계 밖으로 나가기 위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연결은 단절을 전제할 때 의미가 발생한다. 고독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의 말이, 함께 있음을 전제할 때여야 가능한 말인 것처럼 말이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있는 인터넷에 없는 한 가지가 무엇일까. 바로 '끝'이라는 단어이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끄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미 선택을 한 후에도 계속해서 검색을 시도한다. 더 싼 가격의 호텔이, 비행기 표가, 멋진 레스토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도무지 검색을 멈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노마드를 포기하고 과감히 스마트폰을 던져 버린 사람들이 몰두하는 일이 '독서'라는 건 내겐 무척 아이러니하고 상징적인 일이다.
지하철을 탔다. 3호선 창 밖에는 봄의 연둣빛이 여름의 초록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창 밖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스마트폰을 들고 그곳 세상에 빠져 있었다. 나는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책을 펼쳐봤다. 인터넷에는 없지만 책에 있는 분명한 것이 있다. 처음과 끝!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안도감을 주는지 우리는 알고 있었다. 두꺼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넘겼을 때, 온몸을 파고드는 행복한 포만감을 말이다. 스마트폰에는 끝이 없다. 실시간 가격 검색, 실시간 정보들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이상, 최고의, 완벽한, 완결된 검색이란 SNS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며칠에 걸쳐 어렵게 산 로마행 비행기 표보다 30퍼센트나 싼 표를 산 친구의 얼굴이 SNS에 떴다면? 말을 말자. 그것이 지금 우리가 우울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페이스북 심리학 ―수재나 E. 플로레스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