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춘천 낙원동 인성(仁誠)병원은 지상 5층, 지하 1층 종합병원이다. 이 병원 2층은 김면수(95) 이사장 집과 통한다. 1955년 4월 이 자리에 개원할 때부터 병원과 김 이사장 집이 붙어 있었다. 그가 밤낮 가리지 않고 환자를 돌봐서다. 처음 판잣집 같았던 병원은 현재 9900㎡(약 3000평) 규모 신식 병원이 됐지만 병원과 집이 연결된 구조는 예전 그대로다.
1일 오후 김 이사장은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객(客)의 인사에 처음엔 반응하지 않다가 아들 용대(68·인성병원장)씨가 소개하자 미소 지었다. 김 이사장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4년 전에, 위험한 병에 걸려서, 재기 불가능할 걸로 생각했는데, 약간씩 회복을 해요." 용대씨가 귀가 어두운 김 이사장에게 "아버지! 오늘은 말씀 잘하시네요!" 외치며 웃었다. 용대씨는 "아버지께서 새벽에 운동하러 가셨다가 중풍으로 쓰러지셨는데 그때부터 의사소통이 잘 안 된다"고 했다.
김 이사장과 아들 용대씨, 손자 우중(39·고려대 의대 전임의)씨는 지난달 18일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아너 소사이어티(1억원 이상 기부자 모임)'에 가입했다. 김 이사장과 용대씨는 1억원씩 기부하고, 우중씨는 우선 500만원 낸 뒤 5년 안에 1억원을 내기로 했다. 용대씨 아이디어였다.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 이름을 남기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아들이, 또 할아버지 길을 손자가 이어가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김 이사장은 1922년 강원 홍천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자랐다. 춘천고등보통학교(현 춘천고)를 졸업한 뒤 연세대 의예과에 들어갔다. 일제강점기 의대생은 강제징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김 이사장은 아들 용대씨에게 "일제 징용도 피하고, 일본 사람들도 머리 숙이고 병을 고쳐달라고 할 것 같아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잡화상을 하던 김 이사장 부친은 광복 직후 뇌출혈로 숨을 거뒀고, 모친은 6·25 때 북한군 폭격으로 세상을 떴다. 김 이사장은 민간인 의사 신분으로 참전해 부상병을 치료하기도 했다.
김 이사장은 전시(戰時)에 경북 상주에 인성의원을 열었다. 당시 수술을 하면 환자들이 돈 대신 쌀을 냈는데, 상주는 곡창지대라서 가족 먹여 살리는 데 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김 이사장은 곧 명의(名醫)로 소문 났고, 병원은 환자들로 북새통이 됐다. "당시 아버지께서 경찰에 붙잡힌 간첩 맹장 수술을 해주셨대요. 간첩이어서 그랬는지 증상이 심했는지 다른 의사들은 나서지 않았답니다. 수술은 잘 끝났는데 일주일 만에 여인숙에 있던 간첩이 도망쳤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선 치료비 한 푼 못 받으셨고요. 그런데 소문이 퍼졌대요. '인성의원이 죽어가던 사람 일주일 만에 살렸다'고요."
김 이사장은 전쟁이 끝나고 춘천으로 돌아와 병원을 다시 열었다. 외과의사였지만 병원으로 몰려오는 내과, 소아과, 정형외과, 산부인과 환자까지 모두 치료해줬다고 한다. 전쟁 직후 의사와 병원이 부족해서였다. 용대씨는 "아버지께서 하루 다섯 시간 이상 주무시지 못했고 한 끼만 식사하실 때도 많았다"며 "진료와 치료 외에도 다른 전공 분야를 공부하셔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78년부터 이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해온 김혜숙(60) 종합검진실장은 "아프지 않은데도 우리 병원에 와서 들기름이나 콩, 팥, 나물을 놓고 가시는 노인들이 꽤 된다"며 "옛날에 돈 안 내고 치료받은 걸 못 잊는 분들"이라고 했다. 김 이사장은 진료 받고 약을 탄 환자들이 "깜빡 잊고 돈 못 가지고 왔다"고 하면 "다음에 가지고 오세요"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수술 전 보증금을 받았는데, 인성병원은 그러지 않았다. 회복 후 야반도주하는 입원 환자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추수 때면 인성병원 문 앞에 누군가 가져온 곡식 포대들이 쌓였다. 용대씨는 "아버지는 병원비 독촉한 적이 없는데도 병원이 잘돼 이만큼 성장했다"고 했다. "병원비 안 낸 사람들이 한동안 우리 병원에 다시 찾아오진 못해도 누가 아프다고 하면 '인성병원 가면 싹 낫는다'는 식으로 광고해줬다고 합니다."
병원은 현대식이었지만 김 이사장 집 거실은 1980년대 모습이었다. 가구, 전축, 벽시계 모두 골동품 수준이었다. 용대씨는 "학창 시절 용돈을 넉넉하게 받아본 적이 없다"며 "우동 먹고 싶어서 등·하교 때 버스 안 타고 걸어다닌 적도 많다"고 했다. 손자 우중씨는 "할아버지께서는 콧물 나오면 두루마리 화장지 한 칸을 떼어 살살 닦은 뒤 이를 말려서 다시 쓰시는 분"이라고 했다. 김 이사장은 이렇게 아끼고 모은 돈으로 지역 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춘천 로타리클럽 총재를 지낸 그는 로타리 장학회에 꾸준히 기부해 왔고, 강원도 장학회도 정기적으로 후원했다. 1994년에는 그의 호를 딴 송간(松幹) 장학재단도 만들었다. 지금까지 지역 고교생 500여 명과 야학 2곳 학생들에게 장학금 4억원을 줬다. 송간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병원 직원으로 채용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용대씨는 "아버지는 가난한 집에 왕진 갈 때 초등학생이었던 나를 데리고 가고 싶어 하셨다"며 "별다른 말씀은 안 했지만 아들에게 본을 보이고 싶으셨던 것 같다"고 했다.
김 이사장은 1999년 병원장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줬다. 그래도 계속 병원 당직을 섰고 팔순(八旬) 때도 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86세이던 2008년 교통사고를 당해 갈비뼈 열 곳과 쇄골이 부러지고 폐와 심장이 손상을 입는 중상을 입었다. 일주일 의식불명 상태로 생사를 오갔지만 석 달 입원 끝에 회복했다. 하루 4~5시간 운동할 정도로 건강하게 지내다 4년 전 중풍을 앓기 시작했다.
용대씨는 "아버지가 원장으로 계셨을 때처럼, 인성병원이 춘천에서 가장 친절한 병원이라는 얘기를 계속 듣고 싶다"고 했다. 용대씨도 20여 년간 춘천 지역 학교 10여 곳에 장학금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이에 대해 말을 삼갔다.
이 병원에는 용대씨가 만든 13장짜리 '인성병원 의료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가 있다. '환자를 응대할 때 절대 컴퓨터를 쳐다보지 말고 환자의 얼굴과 눈을 바라보며, 친근한 문진과 의학적인 검사를 하고, 그 후에 컴퓨터에 기록하는 것이 습관화되어야 한다'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아들이 봐 왔던 아버지 모습이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