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때문에 구로구에 헌혈증 가진 사람이 남아나지 않는다니까요."

지난 16일 오후 서울 구로구 고척1동 아파트상가 지하 2층에 있는 찜질방 '신원건강랜드'를 찾은 손님들이 이곳 사장 정삼균(48)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찜질방 입구에는 '헌혈증으로 백혈병 어린이도 도와주고 사우나도 무료로 합시다'라는 커다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헌혈증을 가져오면 찜질방 이용료 7000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 사장은 찜질방 개업 1년 만인 지난 2007년 4월부터 '헌혈증 무료입장'을 시작했다. "무슨 거창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저 각 가정에 잠자고 있는 헌혈증을 모아 좋은 일에 쓰자고 생각한 거죠." 그는 대한적십자사에서 헌혈 50회를 기념하는 금장 유공장을 받을 정도로 자주 헌혈을 했다. 그러다 2005년 어느 날 경기 의정부의 한 식당에서 '헌혈증을 가져오면 돌솥 설렁탕이 공짜'라는 안내문을 보고 '이거다'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지난 24일 서울 구로구 신원건강랜드 사우나에서 정삼균 사장이 목욕비 대신 받은 헌혈증을 보여주고 있다. 정씨는 지난 10년간 헌혈증 1만여장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줬으며, 보관 중인 9000여장도 기증할 계획이다.

손님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일요일 하루에만 헌혈증 50여 장이 쏟아져 들어올 정도였다. 30~40대들은 몇 년씩 집안 서랍에 묵혀둔 낡은 헌혈 증서를 들고 왔다. 휴가 나온 군인들도 "헌혈증을 쓸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다"며 자주 찾아왔다.

이렇게 10년간 모은 헌혈증이 2만장이 됐다. 찜질방 비용으로 따지면 1억4000만원에 해당하는 액수다. 구로구청 공무원들은 그를 '헌혈증 갑부'라고 부른다.

정씨는 헌혈증을 백혈병·소아암 환자 등 필요한 사람에게 무상으로 줬다. 2011년에는 마라톤 동호회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13개월밖에 안 된 네팔 어린이의 혈소판 수치가 정상 기준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헌혈증 기부를 간곡히 부탁드린다'는 한 NGO 직원의 글을 보고 헌혈증 127장을 보내줬다. '카포시양 혈관종'이라는 희귀병을 앓던 네팔 어린이 비바스는 국내에서 항암 치료를 받고 1년 3개월 만에 귀국했다. "보내주신 헌혈증 덕분에 항암 치료를 35번이나 받으며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고 감사 인사를 남겼다. 정씨는 "한결 건강해진 비바스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여전히 가슴에 남아 있다"고 했다.

'헌혈증을 기부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가족 중에 백혈병에 걸려 헌혈증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헌혈증 몇 장 줄 수 있겠느냐"고 찾아오는 손님도 많아졌다. 그럴 때면 정씨는 상대의 신원이나 연락처도 묻지 않고 카운터에 보관하던 헌혈증 100장 묶음 4~5개씩을 쥐여 보냈다. 이렇게 10년간 나눠준 헌혈증이 1만1000장에 달한다. 남은 9000여 장은 부모님 이름으로 기부하기 위해 따로 모아두고 있다.

'나눔의 재미'에 빠진 정씨는 2011년 지역 홀몸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1년 두 차례 무료 목욕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2012년부터는 구로구 지체 장애인 그룹홈의 장애인과 교사들에게도 무료 목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구로구는 지난해 정씨의 찜질방을 '구로구 나눔 가게'로 지정하고, 정씨에게 '모범 구민상'을 수여했다.

최근 정씨의 고민은 헌혈증을 들고 찜질방에 찾아오는 손님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찜질방 이야기를 듣고 많은 분이 헌혈증을 들고 목욕탕에 오셔서 몸도 마음도 깨끗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