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을 일컬어 '멘털게임'이라고 부른다. 심리 상태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바로 옆집인 세계가 바둑 동네다. 바둑의 그런 특징을 요즘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윤준상(30) 9단을 만났다. 2016년 16승 17패, 5할 미만 승률로 2001년 입단 이후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던 그가 올해는 막강한 파괴력으로 강자들을 속속 눕히며 12승 2패(17일 현재)의 고공 행진을 계속 중이다.
LG배 조선일보기왕전서는 중국 2위 미위팅 등을 제치고 본선 티켓을 땄고, 맥심배에선 결승에 올라 박정환과 24일부터 결승 3번기를 치른다. GS칼텍스배선 8강까지 진격했고 바둑왕전서도 순항 중이다. 그에게 '공이 수박만 하게 보이는' 대변신을 이끈 실체는 무엇일까. 윤준상은 중국판 인공지능 '줴이(絶藝)' 이야기부터 꺼냈다.
"연초 내가 첫판을 이겼더니 계속 상대해 주더군요. 나와 감각적으로 너무 달라 처음엔 많이 헤맸어요. 이러다 내 감각이 이상해지는 것 아닌가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과감한 중앙 지향적 운석에 공감을 느끼면서 사소한 실리보다 두텁고 대국적인 행마를 구사하게 됐다는 것. 줴이와의 전적은 5승 14패. 그는 조금 부끄러워했지만 이 막강한 인공지능에 5승이나 올린 프로는 윤준상뿐이다.
지난해 슬럼프는 여성 기사 최정에게 연속 두 판을 지면서 본격화됐었다. 발군의 파이터이긴 해도 여성 기사가 30~40단계 위인 남성 강자를 연파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윤준상은 7월 바둑리그서 반집 역전패 후 10월에 만나 또 패했다. "의식 않으려 해도 여자 후배에게 져선 안 된다는 생각에 시달렸죠. 후유증이 연말까지 계속되더군요."
그 무렵 설상가상, 손가락 골절상을 당했다. 밥 먹고 바둑 돌 놓는 일을 두 달째 왼손으로만 하던 어느 날 홀연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득바득 매달린다고 안 될 일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 새해를 맞으며 "결과에 상관없이 후회 없는 바둑만 두자"는 목표를 세우자 거짓말처럼 눈앞의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멘털을 다스리는 데는 운동이 큰 몫을 했다. 자전거 타기, 암벽 등반 등 다양한 스포츠로 체력을 충전했다.
윤준상은 어느 날 갑자기 돌출한 '신데렐라'가 아니다. 만 20세 되던 2007년 천하의 이창호를 3대1로 완파, 제50기 국수에 올라 세상을 놀라게 했던 '영재 엘리트' 출신이다. 국수는 한국 바둑 70년사의 1인자 계보로 통한다. 곧바로 제11기 SK가스배 패권까지 거머쥐자 본격 윤준상 시대가 시작됐다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는 이후 네 차례 준우승에만 그쳤다. 특히 국제대회만 나가면 몸이 굳어 16강 이상을 밟아 보지 못했다.
"올해 맥심배 우승이 가장 큰 과제예요. 10년 만의 기회를 놓칠 수 없죠. LG배에선 4강, 최소 8강까지 가겠습니다. 바둑리그서도 지난해 팀에 진 빚을 갚아야죠." 수더분하고 수줍은 성격의 윤준상이 이처럼 목표를 또렷이 밝히는 건 드문 일이다. 그러곤 낮은 소리로 한마디 보탰다. "그간 국수 타이틀 명예에 어울리는 성적을 못 내 송구했어요. 부모님에게 예전 모습 꼭 다시 보여드릴 겁니다." 윤준상의 '멘털 개조'는 확실한 성공작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