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노래 못 해도 괜찮아! 학교에서 가르쳐줄게. 예쁜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이번엔 학교다. 지난해 101명의 소녀를 두고 온 국민을 ‘프로듀서’로 만들었던 엠넷이 올해는 국내 최초 걸그룹 전문 교육기관을 열었다. 정식 교육과정은 아니고 아이돌 가수를 육성하는 11주간의 교육과정인데, ‘춤과 노래’는 필요 없단다. 얼굴이든 마음이든 ‘예쁘면’ 된다.
‘프로듀스 101’을 성공하게 한 엠넷의 한동철 PD는 지난해 인터뷰에서 “여자 판으로 먼저 만든 건 남자들에게 건전한 ‘야동’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에서다”라고 말했다. 이어 “출연자들을 보면 내 ‘여동생’ 같고 ‘조카’ 같아도 귀엽지 않느냐”며 “그런 류의 야동을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했다.
여자 초등학생 10명 중 1명이 연예인을 꿈꾸고 ‘교복 섹시하게 입는 법’을 공유하는 시대에 ‘미성년자의 성적 대상화’를 얘기하는 건 고루한 비판이 됐다. 하지만 ‘어른 흉내’내는 아이들까지 여성으로 보려는 이들의 욕망은 대체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노래, 춤 NO! 예쁜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한 PD의 말처럼 대한민국 여자 아이돌은 늘 ‘여동생’이거나 ‘귀여운 조카’, ‘요정’이다. 걸그룹의 데뷔 시기는 대학생에서 고등학생, 중학생으로 점점 낮아졌지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성’으로 소비되는 패턴은 변함없다. “발언이 의도와 다르게 실렸다”는 그의 해명을 믿기 어려운 이유다.
나이에 관계없이 실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으면 된다지만, 이 프로그램의 공식은 ‘실력=예쁨’이다. 입학 과정에서부터 ‘춤과 노래’는 선발 기준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대신 “얼굴 혹은 마음, 열정, 끼, 목소리, 눈빛, 미소, 첫인상, 뇌… OO이 예쁜 누구나 지원 가능”이라고 밝혔다. 정말로 ‘뇌’가 예뻐 공부를 잘하는 소녀, ‘마음’이 예뻐 착한 소녀가 뽑힐 수 있을까. 그 답은 ‘미소녀(美少女)데뷔반’ 이라는 부제에서 찾을 수 있다.
제작진이 밝힌 커리큘럼도 노래·춤 실력보다는 철저하게 시청자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아이돌 상품’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매력 어필 전문 트레이닝’을 통한 ‘카메라 조련술’, 빗속에서도 프로답게 춤추는 ‘위기상황 대처술’, ‘균형잡힌 식단과 규칙적인 운동’을 통해 완성된 아름다움. 티저가 공개된 유튜브 계정 댓글 창에서는 “공주들을 위한 영화 ‘바비의 프린세스스쿨(2011)’과 다를 게 없다”는 한 외국 네티즌의 비판이 가장 높은 공감을 얻었다.
◇예쁜 어린이, 섹시한 교복, 이들이 모인 학교… 이래도 괜찮은 건가요?
지난해 방송된 ‘프로젝트101’ 국민투표에서 전체 1위로 뽑혀 걸그룹 ‘IOI’로 데뷔한 전소미(16)양의 별명은 ‘초졸(초등학교 졸업)이’. 전소미양은 올해 2월이 되어서야 ‘초졸’을 벗어나 ‘중졸’이 됐다.
올해는 ‘유졸(유치원 졸업)’ 스타도 탄생할 수 있다. ‘아이돌학교’의 입학 가능 연령은 ‘13세(만 11세:2006년 이전 출생자) 이상 여자’다. 2013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해 현재 5학년인 여자아이들 중 4월 26일 이전에 태어난 어린이부터 지원 가능하다. 제작진이 특별히 나이 상향 제한을 두지는 않았지만, 티저 영상 속 학생들은 칠판에 적힌 이런 문구를 보며 수업을 듣고 있다.
‘원더걸스 소희:14.6세, f(x) 크리스탈:14.9세, 카라 강지영:14.5세, 에이프릴 진솔 13.7세’
우리 사회는 최근 몇 년간 어린이와 미성년자를 성적(性的) 대상화 하는 것을 경계하는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여자 아이돌에 대한 ‘로리타’ 논란, 남자 아이돌에 대한 ‘쇼타콤’ 논란 등이 그것이다.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모습보다는 당당하고 성숙한 모습을 좇아가자는 얘기다. 그러나 성인 기준 나이를 훌쩍 넘긴 이들이 미디어에서 ‘어린이 다움’을 어필하는 것은 이미 대세가 됐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여 아이돌은 대부분 이런 공식을 따른다. 어린 아이들이 어른 흉내를 내거나, 어른들이 어린이 흉내를 내거나.
그렇다면 ‘교복 입은 여성’은 어떤가. 지난 2007년 걸그룹 ‘원더걸스’가 ‘아이러니’를 발표하며 교복을 입고 섹시댄스를 춘 이래 10년간 ‘교복룩’은 풋풋함을 강조하려는 여자 아이돌들이 한 번씩 거쳐 가는 컨셉이 됐다. 지난해 ‘프로듀스101’의 공식 주제가인 ‘PICK ME’ 무대에서도 101명 연습생 전원이 교복을 입고 “나를 느껴봐요, 나를 붙잡아줘, 나를 꼭 안아줘 I Want you pick me up!”을 외치며 군무를 췄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교복자율화’, ‘학생인권조례’등 진통을 겪고도 대부분 학교에서 교복을 유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미성년자들의 신분을 드러내는 옷차림이기 때문이다. 사춘기 학생들이 교복 입은 모습을 스스로 꾸미는 것과 성인들이 그 자체를 패티시로 즐기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번 '아이돌학교'는 조금 더 노골적이다. 핑크빛과 파스텔톤으로 꾸며진 티저 영상에선 허벅지 위로 한 뼘 이상 올라오는 일본식 세라복과 엉덩이만 겨우 가리는 길이의 '브루마*'를 입은 여학생들이 등장한다. 배경은 이런 여학생 수십명이 모인 '학교'다. 자칫 '학교'라는 공간까지도 판타지를 자극하는 요소로 비춰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브루마: 일본식 짧은 체육복으로, 일본 여고생들이 자신이 입던 브루마와 세라복을 팔거나 브루마 입은 초등학생들의 사진을 찍어 거래하는 등 논란이 일면서 사실상 교육현장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TV, 화보 등 미디어에선 여전히 어린아이의 귀여움과 성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일본식 아이돌 시스템… ‘완성품’에서 ‘육성’으로
시즌 2로 방영 중인 엠넷의 ‘프로젝트101’은 전체적인 컨셉과 구도에서 일본 걸그룹 AKB48의 ‘총선거’를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AKB48은 130명으로 구성된 일본의 대규모 걸그룹으로 1년에 한 번 국민투표를 통해 20여명의 ‘선발 멤버’를 뽑아 대표로 방송에 출연시킨다. 엠넷은 이번 ‘아이돌학교’에서도 일본 특유의 아이돌 문화인 ‘육성’ 컨셉을 그대로 들여왔다.
일본의 아이돌 그룹은 가수보다는 ‘엔터테이너’를 지향한다. 가창력이나 춤 실력보다는 개개인의 캐릭터나 컨셉의 매력, 방송에서의 포지션 등을 중심으로 육성된다. 노래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특출난 매력으로 ‘덕심’을 자극하는 멤버가 성공한다. ‘미성숙한 아이가 노력을 통해 성장한다’는 게 아이돌의 세일즈포인트이기 때문에, 대중에 노출되는 나이도 자연히 어려진다.
일본 아이돌 그룹이 대부분 짝사랑을 노래하거나 “이렇게 부족한 나지만 사랑해달라”며 보호본능을 어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스무살이 넘은 성인임에도 교복을 입고 학창시절에 대한 노래를 부르거나 ‘미성숙한 소녀’임을 강조한다. ‘그라비아 아이돌’로 데뷔해 어려서부터 성인용 콘텐츠를 찍거나 ‘처녀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팀에서 제명되는 등 부작용도 크다. 우리나라 아이돌이 일본화돼가는 것이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