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상 정치부 차장

1987년 이래 '운동권' 또는 좌파 진영의 전술적 고민은 대선(大選) 시기 어떤 후보를 지지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야당과 재야가 한 몸이었던 박정희·전두환 시절엔 그런 문제가 없었다. 그냥 야당 후보 지원이 재야의 선거 전술이었다. 그러나 운동권이 이념화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당선 가능성이 있는 유력 야당 후보에게 표를 모아주느냐, 아니면 당선 가능성이 없더라도 독자적 후보를 내세워 정치 세력화 기반을 마련하느냐 하는 선택 문제가 생겼다. 1987년에 운동권은 김대중을 지원하자는 '비판적 지지파'와 백기완 후보를 내세워 향후 진보 정당으로 가자는 '독자파'로 나뉘었다.

사실 1987년의 이 논쟁은 정치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비판적 지지'는 이후 여러 변화 과정을 거치며 지금 민주당의 주류(主流)로 자리 잡았다. 원로 그룹에서는 문익환 목사가 대표적이었고, 당시 20대였던 전대협 그룹이 여기에 참여했다. 가장 과격한 노선과 운동 방식을 고집했던 전대협이 선거 때에는 그들 관점으로 '보수 야당'이던 김대중 진영을 지지한 것은 현실적이면서 실로 창의적(?) 전술이었다. 진영 내부에서도 "운동권이 김대중 2중대냐"는 불만이 나왔는데, 그래서 지지 앞에 '비판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명분을 살렸다. 더 나쁜 세력을 막기 위해 차선을 택하고, 이들과 연대한다는 '비판적 지지'의 탄생이었다.

반면 백기완, 나중에는 권영길 등 독자파 진영은 비판적 지지파로부터 매번 단일화 압박을 받았고 개표함을 열어보면 1~3% 득표를 왔다 갔다 했다. 이들은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이후에야 비로소 정치 주체로 인정받는다. 지금 민주당의 뿌리는 비판적 지지파, 지금 정의당은 독자 그룹을 모태로 한다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후보,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선 후보, 바른정당 유승민 대선 후보.

운동권이 선거 때마다 '비판적 지지' 논쟁에 빠진 것은 독자적 집권이 불가능한 소수였기 때문이다. 자력 집권이 가능했다면 이런 논쟁은 필요하지 않았다. 소수파에게는 전략적 제휴 대상이 필요했고 그 대상이 김대중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호남 정치권이었다. 비판적 지지파는 1997년 김대중, 2002년 노무현의 당선으로 정점을 찍고 이후 민주당과 흡수·통합됐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어 2017년 대선에서는 보수가 소수 자리에 섰다. 보수·진보가 51대49로 접전을 벌이던 구도는 이번 대선에 없다. 그래서 보수 유권자들은 둘이 합쳐 10% 안팎에 머무는 한국당 홍준표,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를 찍을 것이냐, 아니면 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맞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를 선택할 것이냐는 고민에 빠졌다. 이들 중에는 사표(死票)가 되더라도 보수 후보를 찍어 대선 이후를 기약하자는 '독자파'도 있다. 그러나 중도 후보로 진보의 집권을 막자는 '2017년 판 비판적 지지' 보수층이 늘어나고 있다. 그 흐름이 안풍(安風)을 거세게 만들고 있다.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했던 운동권은 지금 민주당 주인이 됐다. 30년 걸렸다. 2017년 '비판적 지지'를 고민하는 보수층과 안철수는 어떤 관계가 될 것인가. 보수와 중도의 '전략적 제휴'가 될지, 아니면 특정 후보의 선거용 도우미로 그칠지, 선택의 순간이 27일 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