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이상에게 '영어'하면 떠오르는 강사가 있다. 1980년대 매일 아침 방송에 나와 '굿모닝 에브리원(Good morning everyone)'으로 시작하는 생활영어를 가르쳤던 민병철(66) 교수가 그 사람이다. 민병철어학원 등 영어 교육 사업에 몰두했던 그는 2007년 인터넷 악성 댓글(악플)을 몰아내고 착한 댓글(선플)을 널리 보급해야 한다면서 선플운동본부를 만들어 이사장을 맡았다. 그 결과 전국 7000여개의 학교와 단체가 선플 운동에 동참했고, 그중 2000여개 학교에는 선플 지도교사가 있다. 민 교수는 "사이버 세상에서 생활하는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면서 "남을 깎아내리거나 헐뜯는 대신에 칭찬하고 배려하는 '긍정 에너지'를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 불어넣는 것이 선플운동의 기본 정신"이라고 했다. 지난 3일 선플본부 사무국이 있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유창빌딩에서 그를 만났다.
칭찬과 배려의 선플로 악플 추방해야
―선플 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2007년 한 여자 가수가 인터넷 악플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 수업을 듣던 대학생 570명에게 과제를 냈어요. 연예인 홈페이지나 블로그의 악플에 악플을 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적고 악플 피해자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선플 10개씩을 달아주라고 했지요. 일주일 만에 5700개의 아름다운 댓글이 달렸습니다. 과제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한결같이 '댓글을 가만두면 안 되겠다'며 선플의 필요성을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선플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선플을 달면 악플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습니까.
"아무리 훈훈한 기사라도 나쁜 댓글이 달립니다. 가령 생활 빠듯한 장애인 부부가 매달 저소득층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는 기사가 있어도 그 아래엔 '세무조사 해봐라' '적은 돈으로 생색낸다' 등의 각종 악플이 달린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악플에 다시 '가슴 따뜻한 얘기'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앞으로 남을 도우며 살겠다'는 식의 선플이 줄줄이 달리면 더 이상 악플은 올라오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벌써 창립 10주년을 맞았습니다.
"선플본부 홈페이지에 가입한 자원봉사자가 64만명입니다. 이들이 올린 선플이 700만개를 넘었고요. 간단한 댓글은 집계에서 제외하고 악플을 달지 말아야 하는 이유나 진심 어린 칭찬·격려의 댓글들만 집계한 숫자입니다. 학생뿐 아니라 많은 국회의원도 선플 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선언문에 서명했고요."
―국회의원요? '막말과 비방'의 대명사로 지탄을 받는 사람들이잖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계속 압력을 넣어야 합니다. 2013년 19대 의원 294명이 선플 운동 동참에 서명했고 이번 20대 의원 281명도 서명했어요. 선플본부 3000명의 모니터 학생이 국회 회의록을 분석해 아름다운 말을 사용하는 국회의원들을 뽑아 선플상을 시상하고 있습니다. '좋은 말을 많이 하라'는 일종의 당근이자 채찍입니다. 요즘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손잡고 대통령 후보들을 상대로 유언비어 그만하고 좋은 말 쓰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어요. 우리 사회는 칭찬이나 좋은 말에 너무 인색해요. 그런 언어문화도 악플의 한 원인이라고 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국민이 비판에 익숙하지만 칭찬엔 어색하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선플 지도교사가 학생들에게 동시에 '엄마 사랑해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게 했어요. 그랬더니 엄마들로부터 '뭐 잘못 먹었냐' '어디 아프니' '왜 지금 이 순간 엄마를 사랑하게 되었니?' 등의 답 문자만 계속 오는 겁니다. 부모·자녀 간에도 사랑의 문자 주고받는 게 이렇게 어색한 거예요. 우리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이기는 법만 가르쳤지, 남을 사랑하고 칭찬, 배려하는 교육엔 소홀한 측면이 많습니다."
중국 등과 교류하며 글로벌 선플 운동
민 교수는 선플 운동을 하기 전에 2005년 '추임새운동본부'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북을 치는 고수가 소리꾼이 창을 할 때 '얼쑤' 하며 흥을 북돋워주는 것이 추임새 아닙니까. 칭찬과 응원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추임새 운동을 시작했던 것이죠." 이후 추임새 운동은 신한은행 등 일부 직장의 문화 프로그램으로 채택됐다. 민 교수는 "추임새 운동이 오프라인 활동이었다면 이를 온라인 세계로 확대한 것이 선플 운동"이라고 했다.
―외국에 선플 운동을 보급하고 있다면서요?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 때 선플 회원들이 추모 선플 1만여개를 올렸고, 이 글을 모아 추모집을 만들어 중국에 전달했어요. 이를 계기로 중국에 선플 운동이 많이 알려졌고, 세월호 참사 때는 그들이 우리에게 추모의 뜻을 보내왔지요. 중국 베이징과 칭다오 대학에서 선플 강연과 캠페인, 토론회도 했습니다. 일본 구마모토 대지진 때도 일본인 피해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제가 선플의 영어 이름을 'sunfull'이라고 만들었습니다. 햇살을 의미하는 'sun'과 가득하다는 'full'을 합친 말이죠. 이제 그 말뜻을 이해하는 외국인들이 있습니다. 선플의 로고는 해바라기(선플라워·sunflower)입니다."
민 교수는 중국 최대 소셜미디어 '웨이보'에 중국인 팔로어 24만명을 거느리고 있고 웨이보가 선정한 공익(公益) 분야 유명인사 세계 랭킹 17위에 올랐다. 중국 항저우에서 새벽에 일하는 환경미화원들에게 무료로 국수를 나눠주는 '장청량 공익국수집'을 응원하는 선플 사이트를 개설해 중국인들 호평을 받기도 했다. "2012년 대전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임재윤 학생이 수학여행 버스 사고로 지금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의식불명에 가깝지만 좋아했던 음악 등을 틀어주면 살짝 웃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재윤이 쾌유를 비는 캠페인에 우리뿐 아니라 중국인들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민 교수는 "사드 문제로 중국과 한국이 대치하고 있어 아쉽지만, 국경 없는 인터넷 세상에선 서로 칭찬하는 문화 운동이 계속돼야 한다"고 했다.
민 교수는 대학(중앙대 경제학과) 재학 중이던 1970년대 초반 KBS 라디오 영어 강의를 맡았고, 이후 미국 시카고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선 학비 마련을 위해 우리나라와 제3세계에서 온 이민자를 상대로 영어를 가르쳤다. 이민자들의 빠른 적응을 돕기 위해 필요한 말을 순서대로 정리해놓은 영어 교재가 '민병철의 생활영어'라는 책이었다고 한다. 그는 1979년 돌아와 2년간 MBC 라디오 영어 강의를 했고, 1981~1984년과 1988~1991년에는 MBC 방송에 아침마다 출연해 생활영어를 강의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아침 30분씩 외국인 강사들을 데리고 영어 수업을 진행하는 강행군이었다. 덕분에 그는 '국민 영어 강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국민 영어 강사 "조기 유학 필요 없어"
―영어 잘하는 사람이 드물었던 1960년대에 어떻게 영어를 잘하게 됐나요.
"어릴 때 서울 연희동에 살면서 호주 사람이 선교사로 있는 교회에 나가게 됐죠. 신앙심 때문은 아니고 당시 교회 가면 맛있는 것 주잖아요(웃음). 선교사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저와 단짝이 된 거예요. 둘이 신촌이나 용산 군부대 쏘다니면서 엄청 놀러 다녔죠. 영어를 가까이하게 된 계기가 됐죠.
―영어 쓰는 친구 있다고 다 영어 잘하는 것은 아니지요. 독특한 비결이 있을 것 같은데.
"구구단 외울 때 이해하고 외운 것이 아닌 것처럼, 처음엔 무한 반복으로 영어를 외우는 겁니다. 단어만 외울 게 아니라 그 상황에 맞는 문장을 통째로 외우는 거예요. 식당에 갔을 경우 주문할 때 쓰는 말과 주문받을 때 듣는 말을 동시에 익히는 겁니다. 저도 각 상황에 맞는 질문과 대답을 카세트에 녹음해서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듣고 따라 했지요. 자주 쓰는 기본적인 대화는 일단 외우고 나서 뜻을 이해하고 문법도 익히면 되는 겁니다."
―중·고교 다닐 때 교사보다 영어 발음이 더 정확했겠는데요.
"영어 수업 시간에 'sword'를 '소드'라고 발음했다가 선생님에게 한 대 맞았었죠. 선생님이 '스워드'를 왜 자꾸 '소드'라고 하냐고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웃음). 지금은 다 '소드'라고 하지만, 당시 수업 중엔 그런 풍경이 가끔 있었습니다."
―영어 배우러 외국 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외국엔 다른 학문을 배우러 가야지, 영어 배우러 가는 것은 잘못됐다고 봅니다. 갈 필요 없어요. 물론 일찍 영어를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쯤 돼도 다른 나라 말 배우기는 쉽지가 않거든요."
―어릴 때 영어 공부 시작하면 교육비가 많이 들지 않나요.
"돈요? 요즘 인터넷 뒤져보면 얼마나 많은 영어 교재가 있습니까. 공짜 교재도 많아요. 아이들 학원 보내거나 큰돈 들여 책 살 필요 없어요. 영어로 된 재미있는 만화영화 계속 반복해 보여주세요. 아이들은 재미있으면 수십 번씩 그거만 봅니다. 그 사이 만화영화에 나오는 영어 대화가 아이 것으로 자연스럽게 소화되는 겁니다."
민 교수는 모교인 중앙대와 건국대를 거쳐 지금은 경희대 국제대학에서 '열정창업'이라는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미국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아파트로 가는데 멀찍이 앞서 가던 노부부가 자기가 들어올 때까지 현관문을 잡고 기다려주는 걸 보고 감동받았다는 제자가 있었지요. 사실 이런 모습이 선진국에선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는 뒷사람이 문을 열지 못하든 문에 부딪히든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는 남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인터넷에서 실천하는 것이 선플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