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주간지 ‘빌리지 보이스’가 ‘살아있는 앤디 워홀’이라는 30주기 특집 기사를 실었다.

올해가 앤디 워홀 30주기다. 워홀은 1987년 2월 22일 뉴욕에서 58세로 죽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뉴욕의 500개 넘는 박물관과 갤러리 어느 곳에서도 워홀 회고전이 없다. 오직 록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리더였던 루 리드의 전시회가 뉴욕중앙도서관에서 개최됐다. 루 리드는 우리나라에선 'Walk On The Wild Side'와 'Perfect Day'를 부른 가수로 유명하다. 나의 친구 김중만씨는 스튜디오 이름을 벨벳 언더그라운드라고 지을 만큼 루 리드의 팬이다. 워홀은 벨벳 언더그라운드 데뷔 앨범의 프로듀서 역할을 했고 앨범 커버도 디자인했다. 그 유명한 노란 바나나 그림이 압권이다.

워홀은 1928년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슬로바키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부부였다. 원래 이름은 워홀라(Warhola)인데, 그가 '글래머'라는 잡지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할 때 크레디트에 실수로 'a'를 빼면서 워홀로 불리기 시작했다. 워홀라와 워홀은 큰 차이가 있다. 비틀스가 원래 이름 'Silver Beatles'에서 Silver를 뺀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미술 선생이 꿈이었던 워홀은 카네기 기술대학(현재 카네기멜런대)에서 상업예술을 전공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유명해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뉴욕이다!" 하고 1949년 뉴욕에 상륙했다. 처음엔 잡지사와 광고 대리점에서 일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한때 구두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난 기절하겠어. 오늘 구두를 550개 디자인했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워홀은 워커홀릭이었다. 드디어 다운타운에 작업실 'Factory'를 차리면서 팝아트의 혁명자가 됐다.

나는 워홀과 동시대에 뉴욕에서 살았다. 그를 뉴욕 길거리에서 10번 이상 봤다. 그는 완전히 쇼핑 중독자였다. 지난주는 블루밍데일 백화점에서, 어제는 헨리 벤델(우리 마누라가 디자이너로 일했던 곳)에서, 또 오늘은 삭스 피프스 애비뉴에서 눈에 띄었다. 번쩍이는 은색 가발을 쓰고 혼자 쇼핑을 한다. 항상 쇼핑백을 너덧 개씩 들고서 말이다. 그가 죽고 나서 4층짜리 집을 뒤지니 열지도 않은 상자와 쇼핑백이 무려 641개나 됐다.

나는 워홀의 작품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었다. 그저 유명한 사람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어서 실크스크린으로 민 것이 그의 작품이었다. 나의 취향은 잭슨 폴록과 막스 에른스트였다. 그런데 지난주에 워홀이 유명해지기 전에 출판한 그림책을 보고 감동받았다. 그는 위대한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워홀은 예술의 개념을 바꾸어놓은 인물이다. 예술가는 굶주리고 고생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버렸다. 예술가는 살아있을 때 부귀영화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워홀은 피카소처럼 모든 영광을 살아있을 때 누렸다. 심지어 뉴욕 상류사회 파티에 참석할 때도 출연료를 받았다. 그가 말했다. "돈 버는 것은 예술이다―비즈니스를 잘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다(Making money is art―Good business is the best art)."

그의 작품 'Silver Car Crash'는 2013년 1억500만달러(약 1190억원)에 팔렸다. 지난 2일엔 마오쩌둥 초상화가 1260만달러(약 142억원)에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