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 먼저 떠난 아들의 추모비가 있는 곳에서 어머니는 17년간 급식 봉사를 해왔다. 2001년 일본 유학 중 도쿄 지하철역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고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숨진 고(故) 이수현씨 어머니 신윤찬(68)씨다. 그는 매주 월요일 부산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입구 '나눔의 터'에서 한 주도 빠짐없이 독거 노인을 위한 급식 봉사를 맡고 있다.
처음 급식 봉사를 시작한 건 아들을 잃은 지 두 달 만인 2001년 3월이었다. 어김없이 공원 안쪽 아들 추모비를 찾은 날이었다. 매일 하는 발걸음, 매일 가지고 오는 꽃다발이었지만 이날따라 그는 추모비 앞 시들어버린 꽃을 치우며 공허함이 밀려왔다고 했다. "애지중지하던 아이를 잃고 나니 나에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더라고요." 주차장에서 추모비까지 매일 다니는 길 대신 우연히 공원 입구로 발을 돌린 그는 한 줄로 길게 늘어선 할머니들과 마주쳤다. 점심식사 급식을 받으려고 줄 선 홀로 사는 노인들이었다. 결심이랄 것도 없이 다음 날부터 밥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쌀을 씻고 있고 나물을 무치고 있었어요."
2001년 시작할 땐 재료 구매부터 준비, 요리까지 모두 신씨가 도맡았다. 당시 나눔의 터엔 가스레인지 1개, 전기밥솥 1개만 있었을 뿐 조리를 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직접 나물을 다듬어서 무치고 생선 조림이나 찜도 하나하나 만들어 포장해서 날랐다. 그는 "취나물 10㎏을 사서 다듬으면 큰 바구니 여러 개에 산더미처럼 쌓이더라"며 "그렇게 많은 음식을 해본 건 난생처음"이라고 말했다.
반찬으로 꼭 필요한 김치도 직접 담근다. 그전엔 김치를 손수 담근 적이 드물었지만 그는 봉사를 시작하면서 1년에 두 번씩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다. 농수산물 도매시장에서 트럭으로 배추를 주문해 배달시키고는 산더미처럼 쌓인 배추를 일일이 절이고 속을 채웠다. 부피를 최소화하기 위해 김치냉장고 속 플라스틱 김치통 대신 비닐봉지에 김장김치를 넣어 보관한다.
봉사하는 날이 돌아오면 그는 오전 6시에 일어나 농수산물 도매시장에 들러 손수 재료를 고른다. 그는 "요즘은 쌀을 지원받지만 20㎏짜리 쌀 한 포대에 감자, 양파, 돼지고기까지 트렁크에 실어갈 적엔 차 뒷부분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며 웃었다.
이웃들 손도 많이 빌렸다. 배추 절이는 날엔 아랫집, 소 넣는 날엔 윗집, 버무리는 날엔 옆집 이웃들이 몰려왔다. 배식을 할 때는 그와 불교 경전을 함께 공부하는 '보현회'에서 일을 거들었다. 급식 봉사를 위해서는 적어도 9명이 모여야 재료 손질과 요리, 배식과 설거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데 강제로 봉사자를 동원하는 게 아니다 보니 일손이 부족한 날도 생긴다. 그는 "마음을 졸이다가도 그런 날엔 꼭 누군가가 문 두드리고 도울 일 없느냐고 물어보더라"고 했다. 작년 어느 날엔 지나가던 40대 남성이, 또 다른 날엔 여중생과 그 어머니가 지나가던 길에 손을 거들겠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는 "정말 하늘에서 누군가가 보고 있어서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신씨가 급식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지키는 건 한 가지다. "모자라서 못 준다는 말만은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했습니다." 재료가 남아서 집에 가지고 가더라도 더 달라는 어르신들에게 부족해서 못 주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300여명의 점심 한 끼를 준비하는 데 드는 비용 20만~30만원은 모두 그가 부담한다.
곧 일흔을 앞둔 나이이지만 그는 요즘도 매주 월요일 홀로 사는 노인 300여명의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봉사를 하면서 가슴이 뭉클하고 벅차오를 때가 많다"며 "어떤 날엔 수현이가 살아 있어도 내가 그 아이를 대하면서 이렇게 가슴에 울림을 느낄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고 했다. "내일모레면 나도 나이가 일흔이니 남편이 '이제 급식 줄 때가 아니라 급식 받을 때'라며 말려요. 아직 힘에 부친 적 없으니 할 수 있을 때까진 계속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