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 시설과 대회 운영 모두 만족합니다. 그런데 날씨가 과하게 좋네요."
평창 동계 패럴림픽(장애인 올림픽·2018년 3월 9~18일)을 1년 앞두고 '테스트 이벤트'로 평창 알펜시아 바이애슬론센터에서 열린 2017 세계장애인 노르딕스키 월드컵. 15일 크로스컨트리 중거리 여자 좌식 종목에서 2위를 차지한 류드밀라 바우초크(36·벨라루스)는 "더운 날씨 탓에 인공 눈이 녹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이날 평창의 낮 최고 기온은 영상 10도. 눈은 '슬러시'에 가깝게 녹아 있었고 걸을 때마다 질척거렸다. 스키가 지난 자리는 맨땅이 보일 정도로 깊이 파여 있었고 눈 녹은 물은 작은 '연못'을 이뤘다. 반소매를 입고 스키를 타는 선수들도 있었다. 선수들은 "설질(雪質)이 이러면 속도가 잘 붙지 않고 미끄러워 넘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3월 중순이 되면 10도를 넘어서는 날씨 탓에 평창올림픽조직위원회는 대책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다. 패럴림픽 설상 종목 마지막 테스트 이벤트가 벌어지는 18일 정선의 낮 최고 기온은 15도로 예보돼 있다. 박건우 평창조직위 설상베뉴 매니저는 "습기 제거제도 뿌려보고 밤마다 인공 눈을 더 쏟아부어 봤지만, 눈 녹는 속도를 당해낼 수가 없다"고 했다.
동계 스포츠 최고 제전을 왜 이런 시기에 치르게 됐을까. 일각에선 "동계 올림픽을 1월, 패럴림픽을 2월로 한 달씩 앞당겨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통상 패럴림픽은 장애인 시설 설치 시간(전환기)이 필요하기 때문에 올림픽 폐막 11~12일 후에 열린다. 따라서 패럴림픽만 앞당길 수 없으니 올림픽 개막을 1월에 하자는 것이다. 더구나 내년 평창 올림픽의 경우엔 2월 25일이 폐막일인데, 이날은 탄핵 사태가 없었더라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임 다음 날이고, 새 대통령 취임식 당일에 해당했다. 올림픽 개회사는 박 전 대통령, 폐회사는 차기 대통령이 하는 별난 일정 탓에 "올림픽 일정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며 문제를 제기했던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미국 최대 스포츠 이벤트인 '수퍼볼(미프로풋볼리그 결승전)'이 없어지지 않는 한 올림픽 일정 변경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동계올림픽·패럴림픽이 한겨울이 아닌 늦겨울(초봄)에 열리는 데는 수퍼볼과 관련한 미 방송사 NBC의 이해관계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윤강로 국제스포츠외교연구원 원장은 "NBC방송은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 가장 많은 돈을 벌어다 주는 기관"이라며 "수퍼볼이 올림픽과 기간이 겹칠 경우 올림픽 독점 중계권을 가진 NBC가 천문학적인 손해를 보게 돼, IOC가 쉽게 올림픽을 앞당기지 못한다"고 했다. NBC는 IOC와 2002년부터 동계 올림픽 독점 중계 계약을 했고, 2014년에는 77억5000만달러(약 8조8600억원)를 지급하며 2032년까지 계약을 연장했다.
NBC는 CBS, FOX와 번갈아가며 3년마다 수퍼볼을 독점 중계(2018년은 NBC 차례)한다. NBC가 수퍼볼 중계를 하지 않는 해에 동계 올림픽이 치러지더라도 시청률 싸움에서 올림픽은 수퍼볼을 당하지 못한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2014년 미국 내 수퍼볼 TV 시청자는 1억1150만명으로 소치 올림픽(하루 평균 2140만명)의 5배가 넘었다. 광고 수입을 따져도 NBC 입장에선 두 대회가 겹치지 않는 게 최선이다. 그 결과 '2월 첫 일요일 수퍼볼, 5일 뒤 금요일 동계 올림픽 개막'이라는 타임라인이 공식처럼 굳어졌다.
'정해진 일정표'에 따라 역대 동계 올림픽과 패럴림픽은 '아슬아슬한 시기'에 치러져 왔다. 러시아 소치(2014) 때는 패럴림픽은 물론이고 올림픽 기간에도 반소매 차림 관객들이 도로를 활보해 외신의 주목을 받았다. 캐나다 밴쿠버(2010), 이탈리아 토리노(2006) 등도 녹는 눈 위에서 패럴림픽을 치렀다.
이런 구조를 이해한다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하기 전 일부에서 제기했던 '평창올림픽 개최 시기' 관련 루머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부 온라인 정치 커뮤니티에서는 '박 전 대통령이 예정됐던 퇴임식을 잔치 분위기 속에서 치르려고 일부러 올림픽 기간을 늦췄다'는 근거 없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평창 동계 올림픽도 이전 4차례 대회와 마찬가지로 수퍼볼이 끝나고 정확히 5일 뒤 개막한다. 내년 수퍼볼은 2월 4일 일요일 열리며, 평창은 9일 금요일 개막해 25일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