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차 북 디자이너인 석윤이씨는 지난해 연말 ‘코리아 디자인 어워드’에서 그래픽 부문상을 수상했다. 국내 디자인 산업 육성을 위해 1983년부터 월간 《디자인》이 제정해 시상하고 있는 이 상의 수상자로 출판인이 선정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어 한국출판인회의가 주관하는 ‘2016 올해의 출판인상’에서도 디자인 부문상을 받았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북 디자이너의 길에 들어선 그는 특유의 색채감을 발휘, 실험적이면서도 책 내용을 충실히 반영한 함축적인 디자인으로 국내 북 디자인 영역을 한층 넓혔다는 평을 얻고 있다.
‘2016 올해의 출판인상’ 디자인 부문 수상
기존 수상자들과 석윤이 디자이너의 차이점 중 하나는 독립 스튜디오 운영자가 아닌, ‘직장인’이라는 데 있다. 그는 현재 출판사 열린책들의 자회사 격인 미메시스의 디자인 팀장이다. 2007년 3월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올해로 꼭 10년이 되었다. 파주 출판단지에 위치한 열린책들 사옥 카페에서 만난 그는 수상 소감을 묻자 “두 상 모두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연락을 받고도 한동안 실감이 나지 않았다”며 웃었다.
“올해의 출판인상의 경우 그동안 워낙 뛰어난 분들이 상을 받았기 때문에, 대선배들만 받을 수 있는 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분들에 비하면 저는 아직 갈 길이 멀죠. 또 코리아 디자인 어워드는 출판 쪽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서 더 의아했어요. 아이덴티티(Identity), 프로덕트(Product), 리빙(Living), 그래픽(Graphic), 디지털 미디어(Digital Media), 스페이스(Space) 등 6개 부문에서 그해 눈에 띄는 프로젝트를 뽑아 전문가들의 심사를 거쳐 수상작을 선정한다고 해요. 지난해 제가 회사에서 ‘열린책들 창립 30주년 기념 대표 작가 12인 세트’를 만들었거든요. 그 표지 디자인이 화제가 된 덕분에 이번에 상을 받게 됐어요.”
열린책들은 지난해 추석 무렵, 독자들의 사랑에 보답한다는 의미를 담아 대표 작가 12명의 작품을 모아 1만 질 한정 세트를 발간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등으로 구성돼 있다. 디자인 팀장으로, 막중한 프로젝트를 맡은 그는 ‘독자들을 향한 선물’의 의미를 담아 단순한 패턴과 색상을 활용해 각 권의 표지를 포장지처럼 디자인했다.
“정확히 말하면 ‘띠지’ 같은 개념으로, 이중 표지로 되어 있어요. 보통 책 표지에 끼워져 있는 작은 띠지들은 벗겨내면 그만이지만, 이건 30주년 기념작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으니 좀 더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시간이 지나도 질리지 않고, 선물의 포장 같은 느낌을 살리고, 그러면서 내용과도 연결되고, 작가의 특성도 드러내야 한다는 게 큰 그림이었죠. 이런 그래픽적 요소와 색감이 지루해지면 언제라도 벗겨낼 수 있어요. 그 안에 또 다른 하얀 표지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책의 첫 문장을 그대로 넣고, 뒤에는 작가의 일러스트를 넣었죠. 12권을 모두 달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반응이 좋아서 뿌듯했어요.”
이전에도 그는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종종 화제가 되었다. 그중 하나가 2013년 열린책들이 번역, 소개해 60만 부 이상이 팔린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다.
그는 작가의 출신지가 북유럽임을 고려해 단순한 디자인을 지향했다. 여기에 손글씨와 주인공을 묘사한 일러스트의 유머러스한 조합을 탄생시켰다. 이 새로운 방식이 한때 북 디자인의 트렌드가 되어 서점가에 비슷한 디자인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조르주 심농의 추리소설 ‘메그레 시리즈’는 각 권 표지마다 다음 책에서 일어날 사건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물건을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그려 넣었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디자인을 물으니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을 꼽았다. 25권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는 모두 다른 각도에서 찍은 작가의 얼굴을 3~4가지 색을 이용해 각 권 표지마다 다르게, 팝아트 같은 느낌으로 꾸몄다. 한 작가의 전작 출간도 드문 일인 데다, 파격적인 표지 디자인으로 이 책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그걸 만든 게 2009년이에요. 당시 입사 3년 차밖에 안 됐을 때라 엄청난 부담감에 시달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하지만 직장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렇게 다양한 디자인을 마음껏 해볼 수 있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죠. 디자인의 영역을 존중하고,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 홍지웅 대표님께 늘 감사하게 생각해요.”
‘소통, 미학, 스타일’을 두루 갖춘 디자인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의 꿈은 전업작가였다. 졸업 후 유학을 떠날 계획을 세웠지만 재학 중 뜻하지 않게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진로를 바꾸어야 했다. 취업을 위해 그래픽디자인 학원을 다니며 편집디자인 프로그램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서점에서 열린책들의 책만 따로 모아놓은 서가를 발견했다. 디자인이 모두 예뻐서 사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떤 출판사인지 궁금해’ 집에 돌아와 홈페이지를 검색하던 중 디자이너 모집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경력사원 모집이었지만 무작정 이력서를 보냈다.
신입으로 채용된 그는 나중에서야 홍지웅 대표가 “미술을 공부한 친구들은 어떤 디자인을 할지 궁금해서” 그를 채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일찌감치 북 디자인의 중요성에 눈을 뜬 그의 선견지명이 지금의 석윤이 팀장을 만든 셈이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손도 느렸고, 실수도 많았고, 무엇보다 팀장님이나 대표님이 디자인의 큰 주제를 던져주면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걸 실제로 표현하는 게 마음대로 안 되는 게 가장 어려웠어요. 게다가 출판사는 정해진 시간 안에 제 일을 해내지 않으면 다음 과정으로 진행이 안 돼 계속 밀리거든요. 한 3년 정도는 ‘나 때문에 책이 안 나오면 어쩌지’라는 중압감과 싸우며 ‘잘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각오로 출근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제가 이 일을 즐기면서 하고 있더라고요. 늘 스스로를 초보라고 생각하고, 배우려는 자세로 열심히 일했는데 그 시간이 저를 단련시켜준 것 같아요. 점점 보는 눈도 생기고, 저만의 스타일도 만들어 가면서요. 무엇보다 대표님께서 제가 잘할 수 있는, 색채감이나 미술적 감각이 필요한 작업물을 많이 맡겨주신 게 역량을 발휘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그는 “처음 서점에서 열린책들이 만든 책들을 보던 날, 나도 모르게 책을 꺼내 들었다”며 “책이 예쁘면 읽고 싶고,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고 한다. 북 디자이너로서 그는 그 기억을 사명처럼 간직하고 있다. 그의 디자인이 ‘소통, 미학, 스타일을 두루 갖추었다’는 평을 얻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