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예회 날 '아빠는 오지 마' 하더군요. 친구한테 창피하다고요."

여섯 살 딸을 둔 직장인 김동열(41)씨는 탈모인(脫毛人)이다. 작년 여름, 딸아이는 집으로 놀러온 유치원 친구가 "너희 아빠 대머리독수리 같다"고 말하는 바람에 상처받고 펑펑 울었다. 종종 월차 내고 유치원 하원 시간에 맞춰 딸아이를 데리러 가던 '딸 바보' 아빠의 즐거움도 그날 이후 사라졌다. "딸이 하루는 울먹이더니 말했어요. '다른 아빠는 다 잘생겼는데 우리 아빠만 할아버지야.' 서운한 마음이 들지만 어쩌겠습니까. 앞으로 자라날 머리카락보다 빠질 머리카락이 더 많을 텐데 저를 더 부끄러워하면 어쩌나 걱정이지요."

#2. 직장인 김진성(36·가명)씨는 스물네 살 때부터 가발을 착용했다. 학창 시절부터 남들보다 적었던 머리숱이 군 제대 후 머리만 감으면 수챗구멍이 막힐 정도로 심하게 빠지기 시작했다. 모발 이식도 고민했지만 의사들은 "사하라 사막에 선인장 몇 그루 심는다고 녹지가 되지 않는다"거나 "억만장자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제 머리카락"이라며 수술을 만류했다. 어차피 빠질 머리카락이라는 것이다. 차선책으로 택한 건 가발. 노안(老顔)으로 보이던 얼굴은 가발 덕에 제 나이로 보였지만, 문제는 자신이 대머리라는 사실을 직장 동료뿐 아니라 여자 친구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대머리 남자를 만나고 싶은 여자가 어딨겠어요. 청혼하기 전에는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여자 친구가 헤어지자고 할까 봐 선뜻 말을 못 꺼내겠어요. 숨기고 결혼했다가 이혼 사유가 되면 어떡하나 염려도 되고요."

섹시한 대머리는 해외 스타들만의 전유물일까. 왼쪽부터 스포츠스타 마이클 조던·지네딘 지단, 영화배우 브루스 윌리스·빈 디젤·숀 코너리·주드 로.

우리나라 성인 남성 대부분은 '탈모 포비아(phobia·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 '더 테이블'이 지난달 20일부터 5일간 20대 이상 남성 33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탈모가 염려된 적 있느냐'는 질문에 무려 99.4%(328명)가 '그렇다'고 답했다. '현재 탈모 또는 탈모 공포증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느냐'는 질문에도 97.3%(321명)가 '그렇다'고 답했다. '탈모 증세를 겪어본 적 있느냐'라는 질문엔 90.3%(298명)가 '그렇다'고 답했다. 탈모가 아니거나 심각한 탈모가 아닌데도 '탈모 과대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문제는 탈모인에 대한 경멸 어린 시선과 조롱이다. 남 외모 평가하기 좋아하는 한국 사회에서 탈모인은 곧잘 비하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탈모인이 움츠러드는 이유다. 그렇다고 빠지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절망만 하는 것이 능사일까. 패션·뷰티 전문가들은 입 모아 "약점은 감출수록 독(毒)이 된다"고 말한다. 탈모를 과감히 '스타일'로 승화시키면 한국인도 '브루스 윌리스' '제이슨 스테이섬' 같은 매력적인 대머리가 될 수 있다는 것. 이 난제(難題)를 극복하고 '섹시한 대머리' 대열에 동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남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대머리를 가리는 걸 영어로 ‘combover’라고 한다. 웹툰 ‘마음의 소리’에서 조석 아버지 조철왕이 즐겨 쓰는 위장술이다. 어원은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황제 줄리어스 시저는 대머리였다. 연인이던 클레오파트라는 쥐 가루, 말 이빨, 곰 기름을 섞은 ‘탈모약’을 만들어 시저 머리에 발라줬지만 효험은 없었다. 번질번질한 정수리를 가리려 월계관을 쓰고 다녔던 시저는 고민 끝에 조금 남아있던 뒤통수 머리카락을 끌어올려 대머리를 가리기로 했다. 빗(comb)을 올린다(over)는 뜻의 ‘combover’란 단어는 이렇게 탄생했다.

‘의사의 아버지’라는 고대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비둘기 똥, 고추냉이, 커민(향신료)을 섞어 탈모약을 만들었다. 중세 해적 바이킹은 거위 똥을 대머리에 발랐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에도 인류는 모공이 막혀버린 정수리에 머리카락을 틔워내지 못했다. 손가락 하나로 세상을 좌지우지하던 권력가 시저도 제 대머리는 극복할 수 없던 것처럼 탈모는 만인의 평등한 난제이자, 시대·인종·국경을 초월한 뜨거운 고민거리다.

웹툰 ‘마음의 소리’에서 조철왕은 남은 머리를 끌어올려 텅 빈 정수리를 가린다.

대머리 부끄러워하는 사회

한국인 다섯 명 중 한 명은 탈모인이다(건강보험공단 2013년 자료). 생로병사로 나아가는 삶의 여정에서 반드시 겪어야 할 노화 과정이기도 하다. 이토록 보편적 증상이지만, 탈모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더 테이블’이 ‘탈모 증세를 겪어본 적이 있다’고 밝힌 20대 이상 성인 남성 298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탈모 때문에 받는 최대 스트레스가 무엇이냐’는 질문(복수 응답)에 277명이 ‘조롱·연민·비웃음 등 남들의 시선’이라고 답했다. 이어 ‘자신감·자존감 저하 등 심리적 위축’(206명) ‘자녀에게 대머리 유전자를 물려줄까 걱정’(68명) ‘나이보다 더 늙어보이는 외모’(44명) 순이었다. 탈모인은 곧잘 조롱 대상이 된다. 중학교 교사 이지호(43·가명)씨는 “탈모가 심해진 이후부터 학생들이 나를 ‘대머리독수리’ ‘두더지’ 같은 동물에 비유한다. 한참 어린 학생들의 조롱 대상으로 전락한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탈모에 맞서 남성들은 고군분투하고 있다. ‘탈모를 예방하거나 개선하려 한 적 있느냐’는 질문에 10명 중 9명이 ‘그렇다’(91.2%)고 답했다. ‘있다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느냐’는 질문(복수 응답)에 297명이 ‘탈모 방지 샴푸·크림 등 보조제 사용’, 291명이 ‘탈모 치료제 복용’, 230명이 ‘병원 치료’를 꼽았다. ‘식단 관리 등 생활 습관 개선’과 ‘민간요법’이라고 대답한 응답자도 100명이 넘었다. 다채로운 방법으로 ‘대머리 공포증’에 맞서는 것. 하지만 일시적으로 탈모 진행 속도만 늦추는 ‘임시방편’이라 초조하기는 매한가지다.

압축 성장의 억울한 피해자?

‘대머리’를 뜻하는 영단어 ‘egghead’는 ‘지성인’ ‘지식인’으로도 해석된다. 지난해 9월 BBC 보도 ‘대머리의 장점(the benefits of going bald)’에서 심리학자 프랭크 무스카렐라 미국 배리대학교 교수는 소크라테스·다윈·처칠 등 ‘대머리 지식인’을 언급하면서 “대머리는 유전적으로 우성(優性)이며 사회적 지위가 높고, 정직하다는 인상을 준다”고 말했다. 이어 “대머리가 유해하고 쓸모없는 것이라면 진화 과정에서 사라졌을 것”이라며 “대머리가 ‘수컷’인 남성에게만 나타나는 건 암컷에게 어떤 ‘신호’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수컷 공작의 화려한 꼬리 깃털처럼 매력을 소구하는 도구인 것”이라고 했다.

일본 아오모리현에선 매년 2월 ‘일본 전국 탈모인 동호회’가 주최하는 ‘대머리 경연 대회’가 열린다. 밧줄 양끝에 달린 빨판을 두 대머리가 각자 정수리에 붙이고 벌이는 스포츠 ‘빨판 줄다리기’, 두상만 보고 누구 머리인지 맞히는 ‘대머리 퀴즈 대회’ 등 탈모를 일상 속 ‘놀이’로 끌어들인다. 1989년 창설된 이 동호회의 설립 목적은 ‘탈모인들만이라도 자신의 대머리를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다. 주최 측이 밝힌 대회 취지 또한 “전국 탈모인 동지들의 자신감을 고양하기 위함”이다. 탈모라는 인생 순리를 꺼리거나 회피하지 않고 유쾌하게 소비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대머리를 유독 치부로 여긴다. 그 원인을 ‘압축 성장’의 부작용으로 보는 분석도 있다. 급속한 산업화를 겪으며 경제 활동에 투입되는 인력이 갑자기 많이 필요해지면서 기업의 채용이 급증했다. 한꺼번에 대규모 인력 채용이 이뤄져야 했기에 다면(多面) 평가를 할 겨를이 없었다. 자연히 사람을 판단할 때 ‘외모’ ‘학벌’ 같은 가시(可視)적 기준을 앞세우게 됐고, 외모 지상주의 풍토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대머리는 그 틈에 억울한 피해자가 됐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외모 지상주의의 만연은 자연스러운 신체 변화도 ‘부끄러움’으로 간주한다”면서 “대머리 공포증은 대물림되는 ‘시선 폭력’의 일종”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3월 서울패션위크 런웨이를 걷는 모델 박성진. 빡빡 민 머리 스타일에서 섹시한 남성미가 묻어난다.

‘섹시한 대머리’로 거듭난 사람들

직장인 박선호(44)씨는 지난해 여름부터 ‘완전 대머리’가 됐다. 정수리 아래 남아있던 옆머리와 뒷머리를 밀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 대머리 선언’ 후 피트니스클럽 회원증을 끊어 퍼스널 트레이닝(PT)을 받고, 옷·신발·안경 등 패션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살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똥배 나온 대머리 아저씨’보단 ‘자기 관리 잘하는 대머리 아저씨’가 되자고 마음먹었어요.” 박씨는 동경하는 대상으로 배우 숀 코너리를 꼽았다. “미국 영화 보면 숀 코너리, 우디 해럴슨처럼 대머리지만 멋진 중년이 많잖아요. 이 사람들은 대머리를 숨기기보단 자기만의 색깔로 소화해요. 구레나룻부터 이어지는 흰 수염으로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숀 코너리를 보면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6개월 넘도록 운동으로 몸을 다진 그는 “다부진 체격 덕분인지 ‘젊어 보인다’는 말을 요즘 더 듣고 있다. 머리카락이 없는데도” 하며 웃었다.

한세규(40)씨는 “대머리는 간절히 살아왔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결혼식에서 남은 머리카락을 ‘바리캉’으로 밀고 버진로드(결혼식장 바닥에 까는 융단)를 걸었다. 대신 세련된 뿔테 안경을 꼈다. 그리고 신부에게 말했다. “태어나서 네 번 머리를 밀어 봤어.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때, 고시 공부 시작할 때, 군대 입대할 때, 그리고 오늘.” “사람은 무언가 결연한 의지를 다질 때마다 머리를 밀잖아요. 그 간절함을 담아 결혼 생활 하겠다고 말했어요. 열심히 살다 보니 이젠 굳이 안 밀어도 머리가 휑하지만.” 반질반질한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쓱 훑으며 그가 웃었다. 검은 뿔테가 멋스러웠다.

[탈모, 진실 혹은 거짓] 탈모와 정력은 무관… 머리 자주 감는다고 더 빠지지는 않아

대머리는 몸에 털이 많다. ○

―탈모를 유발하는 호르몬 ‘디하이드로테스토스테론(DHT)’의 활동 구역은 ‘머리’다. 이 때문에 머리는 휑하지만 턱·가슴·팔·다리 등 다른 부위는 북슬북슬한 ‘대머리 털보’가 탄생한다.

대머리는 정력이 세다. X

―탈모와 정력은 무관하다. 대머리인데 정력이 세다면, 본래 센 것이다.

야한 생각을 하면 머리카락이 빨리 자란다. X

―성욕·남성호르몬·탈모의 관계를 ‘오해’해서 생긴 낭설이다.

비만일수록 탈모 위험성이 높다. X

―비만지수와 탈모 사이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단, 피자·햄버거·라면 등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섭취하면 체내 호르몬 분비를 교란시킨다. 비만보다는 ‘잘못된 식습관’이 문제다.

머리를 자주 감으면 더 빠진다. X

―머리를 감을 때 빠지는 머리카락은 제 할 일 다해 ‘어차피 빠질 머리카락’이다. ‘안 빠질 머리카락’은 쥐어뜯지 않는 이상 머리감기로 빠지진 않는다.

대머리는 ‘모계(母系) 유전’이다. X

―대머리의 70%는 유전, 30%는 질병·스트레스 등 생활 환경이 원인이다. 부모 중 한 사람만 대머리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도 유전 가능성이 있다.

탈모약을 먹으면 정력이 떨어진다. ○

―탈모약의 주성분은 ‘피나스트리드’ ‘두타스테리드’다. 복용자 중 2~5%에게서 정력이 떨어지는 ‘부작용’이 나타난다.

블랙푸드를 많이 먹으면 탈모가 예방된다. X

―검은콩·검은깨·흑미 같은 ‘블랙푸드’가 다른 식재료와 비교해 탈모에 특효라고 볼 근거는 없다. 2달 동안 탄수화물을 끊고 검은콩만 먹었던 환자는 영양 불균형으로 되레 탈모가 심해지기도 했다.

탈모는 극복 가능하다. ○

―제때 병원 치료를 받는다면 탈모가 악화되는 걸 막고, 회복도 할 수 있다. 모발이식 같은 ‘최후의 보루’도 있다.

※도움 주신 분: 이영희 리치앤영 탈모전문센터 원장, 노윤우 맥스웰피부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