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2월 15일 경기도 분당 어느 아파트 현관에서 한 남자가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쓰러졌다. 김정일 전처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이었다. 이씨는 1982년 스위스 어학연수 중 한국으로 망명했다. 경찰과 국정원은 현장에서 권총 탄피 2개를 발견했다. 간첩들이 자주 사용하는 브로우닝 권총이었다. 국정원과 경찰은 "북한 소행으로 보인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범행에 몇 명이 가담했는지 당시엔 확인하지 못했다.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 듯했다. 그런데 그해 10월 이른바 '부부 간첩단 사건' 범인이 검거되면서 범행 윤곽이 드러났다. 남파된 부부 공작조가 "8개월 전 이한영 암살은 전문 테러 요원인 최순호와 신원 미상 20대 등 2명으로 구성된 특수 공작조가 저질렀다"고 진술한 것이다. 이들은 범행 한 달 전 남파(南派)됐으며 이한영 살해 후 다시 북으로 되돌아갔다고 했다.

▶그제 일본 아사히신문이 우리 정보 당국자 말을 인용, "김정남 암살에 조선인민군 정찰총국 제19과 요원들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정찰총국 19과 책임자 최순호 과장은 1997년 이한영이 총에 맞아 숨질 때 남파된 공작원 가운데 한 명"이라고 보도했다. 이한영을 암살한 인물이 김정남 암살도 지휘했다는 것이다. 정찰총국 19과는 독극물에 의한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으로 2011년에는 서울에서 탈북자를 동원해 다른 탈북자에 대한 독침 테러를 시도한 적도 있었다.

▶이한영을 암살하기 위해 최순호가 남파될 당시 같은 부서에 윤동철이라는 공작원이 있었다. 그는 작년 봄부터 노동당 통일전선부 문화교류국을 책임지는 것으로 전해진다. 문화교류국은 이름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는 조직이다. 간첩을 남파시켜 무장봉기를 유도하고 반(反)김정은 인사에 대한 테러와 암살 조직을 운영한다. 보도대로라면 이번 김정남 암살 사건은 문화교류국 지원 아래 정찰총국 19과가 추진한 것이 된다. 20년 전 이한영 살해범의 그림자가 김정남 암살 사건에 어른거린다. 무서운 영화 같은 일이다.

▶이한영은 죽기 8개월 전 북 정권의 실상을 폭로하는 '대동강 로열패밀리'를 출간했다. 김정남은 인터뷰 등을 통해 북한 3대 세습을 공개적으로 반대해 왔다. 두 사람은 김정일 생일(2월 16일)을 각각 하루, 사흘 앞두고 살해됐다. 북한 김씨 왕조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암살하는 킬러를 국가적으로 양성하고 그들을 특급으로 대우한다. 이번 김정남 암살범도 이한영 암살범처럼 영웅 대접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게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북한 집단의 정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