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루소·피카소 등 '고귀한 야만'에 매료된 예술가들
19세기, 기술로부터 독립한 서양 예술
서양과 달리 '정신의 표현'에서 시작된 동양 미학…서투름에서 비롯된 고귀한 정신세계

폴 고갱은 ‘타히티의 여인들(1891)’에 새로운 풍습과 전통의 충돌을 담아냈다.

"옛날로 돌아가자, 발전이 있을지니"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윌리엄 셰익스피어

격변의 시기, 현재가 고통스럽고 미래가 암울할 때, 사람들은 종종 과거에서 지혜를 구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예술가들이 그랬다. 이때는 철강, 전기, 화학공업 등의 획기적인 발전에 힘입은 새로운 기술, 소재, 기계의 발명 덕분에 인간의 생산 활동이 눈부신 도약을 이룬 시기(소위 2차 산업혁명)이다.

문명은 축복과 더불어 저주를 잉태하고 있다. 서양 문명의 브레이크 없는 탐욕은 독점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 발전하여 식민시대, 제1차 세계대전, 나치즘, 제2차 세계대전, 냉전 등 인류 역사상 가장 불행한 시대를 만들었다. 축복은 자본가와 서구 열강의 차지였고 저주는 노동자와 식민지의 몫이었다.

예술가들은 이 시기를 기대와 두려움, 희망과 좌절로 통과했다. 누리는 사람에게는 천국이었고 당하는 사람에게는 지옥이었다. 고갱은 문명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그는 문명세계에서 먹는 끼니보다 거르는 끼니가 더 많았다. 풍요속의 빈곤은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고갱은 자신의 불행이 문명 때문이라고 단정 짓고, 원시적인 것, 이국적인 것(비 유럽적인 것), 야만적인 것을 찬양했다. 1889년에는 “나는 야만성에 기반을 둔, 좀 더 자연적인 것으로써, 썩은 문명에 대적하고자 한다”고 선언하면서 원시주의(Primitivism) 미술의 파이오니어가 되었다.

이 시기 고갱을 필두로 클림트, 블라맹크, 마티스, 드랭, 피카소, 앙리 루소, 브랑쿠시, 모딜리아니, 자코메티, 바버라 헵워스 등 많은 예술가들이 원시주의의 복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려했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남태평양, 아시아 등 식민지 미개인들이 만든 예술이었다. 이들은 ‘고귀한 야만(noble savage)’의 순진무구함에 열광했다.

◆ 야만인을 자처한 예술가들…피카소·고갱 등 당대 최고 화가로부터 ‘원시주의’ 시작

고갱은 야만인을 자처했다. 그는 ‘오비리(OVIRI, 타히티 말로 야만인, 1894년)’라는 도자기 작품을, 살아서는 정원에, 죽어서는 무덤 앞에 두고 싶어 했다. 외계인처럼 괴이하게 생긴 긴 머리의 여인이 피투성이가 된 늑대를 짓밟고 있는 형상이다. 격렬하고 신비로우며, 원시적인 ‘오비리’는 현대문명에 대한 고갱의 격한 증오다. 피카소는 ‘오비리’를 ‘아비뇽의 처녀들’에 차용했다.

폴 고갱의 ‘오비리(타히티 말로 야만인, 1894년)’.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였던 고갱은 문명세계에 혐오를 느껴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고, 원주민의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에 자극받았다.

아프리카 가면을 처음 집단적으로 예술에 도입한 것은 야수주의 화가들이다. 블라맹크(Maurice de Blaminck, 1876-1958)는 1905년 여름 어느 날, 한 카페에 걸려있는 아프리카 가면의 원시, 본능적 아름다움에 감전되었다. 가면을 구입한 블라맹크는 마티스와 드랭을 불러 보여주었다. 마침 전통적인 방식에 좌절하고, 고흐와 고갱의 ‘원시적인 색채와 양식’을 존경하던 이들은 아프리카 가면에서 계시를 받았다.

그들은 대상을 원시적인 색채와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대상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드랭은 ‘콜리우르 항의 배들(1905년)’에서 모래사장을, 그 열기를 전달하기 위해 붉은 원색으로 칠했다. 마티스는 ‘모자를 쓴 여인(1905년)’에서 아내의 모습을 아프리카 가면처럼 그렸다. 이들의 작품은 야성적이고 강렬했다.

1906년 가을 어느 날, 피카소는 스타인이라는 컬렉터의 집에 들렀다. 그 집에는 마티스가 먼저 와 있었다. 피카소는 마티스가 들고 있던 아프리카 나무 조각 ‘흑인 두상’을 보고 전율을 느낀다. 그는 곧바로 아프리카 가면을 보기 위해 민속학박물관을 찾았다.

피카소는 훗날 신비롭고도 무서웠던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계속 거기에 있었다.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그림을 그려야하는 이유를 알았다. ‘아비뇽의 처녀들’이 나를 찾아온 것은 분명 그날이었다. 단순히 그림 속 여인들의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처음으로 퇴마(Exorcism, 구마(驅魔), 귀신을 쫓아내는 일)를 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분명 그렇다!”

피카소가 본 아프리카 조각은 ‘정체불명의 기이하고 사악한 힘’이 서려있는, ‘귀신을 퇴치하려고 만든’ 주물(呪物), 마법(魔法)이 깃든 물건이었다. 피카소가 퇴치하려 한 귀신이 고갱의 ’문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고갱의 ‘오비리’를 본 것도 이 무렵이었다.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키스(1907-1908)’. 브랑쿠시는 민속 조각과 현대 조각을 결합해 조각 분야에 추상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선구적 작가였다.

◆ ‘기술로부터 독립한 예술’ 훈련받지 않은 아마추어 ‘일요 화가’가 인간의 내면 그려내다

브랑쿠시의 대리석 조각 ‘키스(1907-1908년)’나 모딜리아니의 석회암 두상 ‘머리(1910-1912)’는 원시미술에서 영감을 얻었다. 실존주의 예술가라 불리는 자코메티의 앙상하고 기다란 인체 조각은 코트디부아르 열대 우림에 사는 단(Dan)부족이 만든 여체 모양의 기다란 의식(儀式)용 주걱을 차용한 것이다. 영국의 조각가 헨리 무어나 바버라 헵워스의 조각도 원시 부족과 고대 예술에 빚지고 있다. 원시주의는 당시 유럽 미술의 트렌드였으며, 원시 조각을 모으는 것이 화가들 사이에 유행이었다.

야만성은 원시인에게 있듯이 어린 아이에게도 있다. 고갱은 새로운 것을 이루려면 근원으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내가 배운 모든 것이 나를 구속한다.”고 했고, “예술가들이 원시성과 본능, 궁극적으로는 상상력을 빼앗기면서 창조의 요소를 찾지 못한 채 미로를 헤맨다”고 했다.

피카소는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법을 배울 때까지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기까지는 평생이 걸렸다고 했다. 어린이의 순수함은 제도권이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꿈꾸고, 표현하도록, 강요한 ’지식과 기술‘의 부재에서 나온다.

문명화된 유럽 전통에 속하지 않는 미술을 원시주의 미술이라고 부르듯이 제도권의 화가 집단에 속하지 않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화가의 미술도 원시주의로 분류한다. 근대 화가들의 지상과제가 전통과 관습의 해체였다면, 아마추어 화가들에게는 이런 양식화된 기술을 습득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자유인이었다. 이들의 작품은 서툴고 소박할 수밖에 없었으며, 순박함이 인간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앙리 루소의 ‘여인의 초상, 1895’. 루소는 1893년 전업 화가의 길을 걷기 위해 세관에서 은퇴했지만 아마추어 화가, 일요화가로 여겨져 조롱당하기도 했다.

피카소는 몽마르트르 언덕의 한 중고품 가게에서 마주친, 어떤 아마추어의 그림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 작품을 캔버스 값에 불과한 5프랑에 사서, 작업실의 가장 좋은 장소에 걸어놓고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다. 이 그림은 피카소가 ’나를 강하게 사로잡은, 프랑스에서 가장 솔직한 심리 초상화‘라고 평가한,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의 ‘여인의 초상(1895년)’이었다.

화가들로부터 ’두아니에(Douanier, 세관원)라고 불린 루소는 40살이 다 되어서야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일요화가(Sunday painter)였다. 기본이 안 된 그의 그림은 늘 웃음거리였다. 루소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화가들의 친구가 되게 해준 것은 피카소였다.

제도권 화가들과는 전혀 다른 영역에 거주한 몽상가 루소의 초현실주의적 작품은 다른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과 즐거움을 주었으며, 그는 위대한 화가가 되었다. 고흐, 고갱, 세잔느, 마티스도 어려서부터 전문적인 학습을 받았거나 ‘기술’에 천재성을 보인 화가들은 아니었다.

‘예술의 기술로 부터의 독립’을, 미술사가 곰브리치(E. H. Gombrich)는, ‘20세기 초 전 유럽을 휩쓸었던 위대한 예술혁명이 획득한 불멸의 수확’이라고 했다. 철학자 카시러(Ernst Cassirer)는 ‘예술은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reality)를 발견해 내는 것’이라고 했다.

’세한도(歲寒圖, 1844)’는 조선후기의 학자 김정희가 그린 그림이다. 전문화가가 아닌 선비가 그린 문인화(文人畵)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아 대한민국 국보 180호로 지정됐다.

◆ ‘정신의 표현’으로부터 출발한 동양의 미학…“예술의 가치는 정신에 있는 것”

서양의 미학이 사물을 모방(mimesis),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내면 혹은 사물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표현(expression)하는 것으로 발전했다면, 동양의 미학은 거꾸로 정신(精神)의 표현으로부터 출발했다. 기술보다는 정신을 중시했다. 동양화에서는 모방이나 재현보다는 정신을 드러내고(전신, 傳神), 뜻을 그리는 것(사의, 寫意)을 중요시했다.

실물을 사실적으로만 그리는 것은 치졸하고 유치하다고 여겼다. 회화는 대상의 본질을 생생하게 표현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즉, 기운생동(氣韻生動)을 회화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이자 서예가, 화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아들 상우(商佑)에게 보낸 편지에 “난(蘭, 난초)을 그리는 법은 예서(隸書)를 쓰는 법과 같으니 문자(文字)의 향기와 서권(書卷)의 정취가 있은 다음에야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난 치는 법은 그림 그리는 법칙대로 하는 것을 가장 꺼리는 것이니, 만일 그림 그리는 법칙을 쓰려면 일필(一筆)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썼다. 예술의 가치는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드러내는 정신에 있다는 것이다.

추사의 ‘세한도(23x69.2cm, 1844년, 국보 188호)’의 위대함은 ‘서투름’에서 나온다. 추사는 유배지 제주도에서 제자 이상덕의 변치 않는 마음을 고맙게 여겨 ‘추운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淍)“는 논어의 한 구절을,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솜씨로 그림으로써 그가 처한 신산한 처지와 사제 간의 정리를 절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숙련된 기술로는 전할 수 없는 정신세계이고 예술이다.

조선시대의 전문 화가였던 화원(畫員)은 정부 관청인 도화서(圖畫署)에 소속되어 정부나 왕실, 사대부의 기록용, 제의용 혹은 장식용 회화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뛰어난 기술은 잡기나 말예(末藝, 가장 낮은 예술)로 취급하며 천하게 여겼다. 회화감상 자체도 완물상지(玩物喪志, 물건을 즐기다 보면 뜻을 잃는다)라고 하여 군자가 경계할 대상으로 여겼다.

‘성종실록’에는 ”언관(言官) 이세광이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궁궐에서 화공을 모아 초목, 금수를 그리게 하셨다는데....완물상지라 했으니 전하께서는 그림 그리는 일에 마음을 두시는 것이 완물에 빠지는 조짐이 아닌가, 두렵습니다....무릇 임금께서는 마땅히 좋아하심을 삼가셔야 하오니, 지나치게 좋아하면 반드시 폐단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술을 천시하는 조선시대의 가치관은 오늘날 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18세기 후반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김홍도의 ‘빨래터’는 한국의 대표적인 풍속화로, 백성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서민풍속도(庶民風俗圖)다.

사실적인 묘사가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속화(俗畫)와 진경산수(眞景山水)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윤두서, 조영석, 김홍도, 신윤복, 정선 등은 관념이나 정신이 아니라 일상과 실재(reality)를 그리며 리얼리즘 시대를 열었다. 이들은 서민들의 습속과 주변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 김순응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고, 23년 간 금융업에 종사하다 미술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으로 50세에 미술계에 뛰어들었다. 하나은행 자금본부 본부장을 거쳐 2001년부터 3년 간 서울 옥션 대표로 활동했다. 2005년 케이옥션을 만들어서 국내 미술품경매산업의 눈부신 성장에 기여했으며, 현재는 김순응아트컴퍼니를 만들어 젊은 작가 지원에 힘쓰고 있다.